"작환(作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9일 (토) 23:1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작환 |
한글표제 | 작환 |
한자표제 | 作還 |
상위어 | 환곡(還穀) |
관련어 | 전환(錢還), 진휼청보환곡(賑恤廳補還穀), 보삼환곡(補蔘還穀) |
분야 | 경제/재정/환곡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문용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작환(作還)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효종실록』 1년 5월 25일, 『정조실록』 8년 2월 9일 |
여러 명목의 곡식·군포·돈 등을 환곡으로 만드는 일.
개설
1650년(효종 1) 호조(戶曹) 환곡의 이자 30%를 상평청에 이관하는 ‘삼분모회록(三分耗會錄)’을 시행하여 상평청 환곡을 창설하였다. 이후 새로운 환곡이 계속 만들어졌고 이러한 새로운 환곡을 채우는 재원 역시 다양해졌다. 기존 환곡의 이자를 떼어 내어 만들거나, 각 기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돈·포목 등을 곡식으로 바꾸어 환곡을 만들었다. 또는 각 지역에서 납부해야 하는 세금이나 공물을 중앙에 상납하지 않고 곡식으로 바꾸어 환곡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창설된 환곡은 주로 흉년을 대비한 환곡이 많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는 각 기관의 운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설치된 환곡이 많아졌다.
내용
17세기 후반에 청나라 사신의 접대 비용을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상평청 환곡을 창설하여 비축 곡물을 확대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효종실록』 1년 5월 25일). 하지만 아직도 전반적인 국가 재정은 넉넉하지 못하였다. 특히 흉년이 들 경우에는 진휼사업을 위한 곡물의 확보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17세기 후반 이후 강화도와 남한산성에는 비상시를 대비한 군자곡을 비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나라와의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비상용 곡물의 비축이 이전만큼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흉년이 들었을 때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비상용 곡물을 경기 각 지역에 진자로 이전하기도 하였다. 곡물을 이전받은 곳에서는 환곡 부족을 이유로 빌려 온 곳에 상환하지 않고 그 지역의 환곡으로 만들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군량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잘 허락되지 않았다.
18세기 전반까지도 곡식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삼군문(三軍門)에 납부해야 하는 군포를 상납하지 않고 그 지역에서 곡식으로 바꾸어 환곡을 만들기도 하였다.
새로 만들어지는 환곡은 그 원본의 출처나 사용 목적을 드러내는 이름을 붙였다. 1784년(정조 8)에 강원도에서는 대동세(大同稅)의 전미(田米)와 인삼 대신 바치는 삼가전(蔘價錢)으로 환곡을 만들었다. 그리고 진휼청 환곡을 보충한다는 뜻인 ‘진휼청보환곡(賑恤廳補還穀)’을 창설하였다(『정조실록』 8년 2월 9일). 1790년(정조 14)에는 강원도의 인삼 공납을 보조하기 위하여 ‘인삼 가격을 보충하는 환곡’이란 의미의 ‘보삼환곡(補蔘還穀)’을 만들었다.
변천
각종 물자로 새로운 환곡을 만든다는 의미의 작환은 19세기 후반 환곡 운영이 극도로 문란해지자 폐단으로 인식되었다. 1854년(철종 5) 경상도에서는 결세(結稅)나, 관청에서 징수하지 못한 곡물을 전환(錢還)에서 가져다가 액수를 채워 넣은 것도 작환이라고 하였다. 전환은 봄에 곡물 대신 돈으로 분급하고 가을에 곡식으로 징수하는 환곡을 말하였다. 경상도의 사례는 지방관이 징수하지 못한 부세의 부족분을, 환곡을 전용(轉用)하여 충당한 것으로 이해된다. 부세 부족분을 충당한 만큼의 환곡 원곡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무리한 환곡 운영은, 현물을 분급하지 않고도 가을에 아무 관련이 없는 백성들에게 환곡 명목으로 징수하는 백징(白徵)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편, 『인천학의 원근법』,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3.
- 장명희, 「18세기 후반~19세기 중반 환곡 운영의 변화: 이무입본(移貿立本)과 모조(耗條) 금납화의 성립 배경을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