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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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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상진곡 |
한글표제 | 상진곡 |
한자표제 | 常賑穀 |
관련어 | 상평청(常平廳), 진휼청(賑恤廳), 삼사곡(三司穀) |
분야 | 경제/재정/환곡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영조~고종 |
집필자 | 양진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상진곡(常賑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46년 9월 14일 |
상진청과 진휼청이 합쳐진 것을 상진청이라 하였으며, 합쳐진 두 기관이 관리하던 곡물.
개설
상진곡은 상진청(常賑廳)이 관리하던 환곡을 일컬었다. 상진청의 중심적인 사업은 진휼이었고, 그 외에도 사신 접대 비용 혹은 관청 수리 등 부족한 경비를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상진청은 상평청과 진휼청의 기능을 하나의 기관으로 통합하여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2개의 기관이 합쳐지면서 상평청과 진휼청에서 관리하던 곡물도 하나로 합쳐 상진곡이란 명칭으로 운영되었다. 이로써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하고 행정적인 효율성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상진곡은 조선후기에 원회곡(元會穀)·비변사곡(備邊司穀)등과 함께 삼사곡(三司穀)으로 불렸을 만큼 중요한 환곡으로 인식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상진곡은 상평청과 진휼청을 합친 상진청의 운영을 위해서 설치한 환곡이었다. 상진곡은 상진청이 설치됨으로써 설정된 곡물로, 이전의 상평곡과 진휼곡을 합친 것이었다. 이로써 유사한 기능을 지닌 곡물을 통합할 수 있게 되었고, 별개의 항목으로 구분하여 관리하는 것보다 하나의 명칭으로 보다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내용
상진곡은 원래의 곡물이 부족하면 곳에 따라 대동미 등을 봉류하여 조성되기도 하였으며, 원래의 목적인 진휼 외에도 사신을 접대하거나 능(陵)을 보수하거나, 관청을 수리하는 데 사용하거나 혹은 상정미 등을 보충하는 데에도 사용하였다.
상진청에서 관리하는 곡물은 상진곡을 포함하여 매우 다양하였다. 예를 들어 상진청이 관리하는 것으로 경기에 소재한 곡물은 상진곡·보환곡(補還穀)·원칙수곡(元勅需穀) 등이 있었으며, 호서 지방은 상진곡·보환곡, 호남 지방은 상진곡 외에 제세조(堤稅租)·나포곡(羅鋪穀)·경인년 군작미·경술년 무미(貿米)·보민사속조(保民司贖租)·병영 상진곡 등 다양하였다.
변천
상평청과 진휼청은 2개의 기관이 각각의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하여 설치되었다가 다시 혁파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상평곡과 진휼곡은 여전히 다른 계정으로 회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상진청으로 기구가 단일화되면서 중앙에서는 회계가 통일되었고, 상진청이 구관하는 곡물의 이름은 ‘상진곡’으로 불렸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여전히 상평곡과 진휼곡 2개의 명칭으로 회계가 분리되어 이중적인 계정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상진곡은 중앙 아문의 회계 방식에 적용되는 정도이며 실질적으로 회계상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1770년(영조 46)에 선혜청 제조정홍순(鄭弘淳)이 상평청 곡식과 진휼청 곡식을 달리 회계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점을 들어 지방에서도 하나로 합쳐 회계가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한 사실은 이를 반영하였다(『영조실록』 46년 9월 14일).
지방에서 곡물 장부를 정리하는 방식은 여전히 옛 관례를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곡물을 출납할 때 반드시 장부를 나누어서 시행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와 같은 관행은 두 관청의 장부를 회계하는 데 많은 혼란을 일으켰지만, 두 곡물의 회계를 통합하는 조치로 말미암아 전국의 상진곡이 동일한 이름으로 통일적으로 장부상에서 회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홍재전서(弘齋全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경세유표(經世遺表)』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