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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1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무관을 선발하기 위하여 시행한 무과초시 중 중앙에서 실시한 시험.

개설

조선시대에는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를 실시하면서 처음부터 과거삼층법(科擧三層法)을 도입하였다. 이로 인하여 초시(初試)를 통과해야 회시(會試)에 응시할 수 있었고, 회시에 합격해야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오를 수 있었다. 초시의 경우는 어느 한 지역에서 합격자의 절대 다수가 배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역 할당제를 시행하였다. 이때 중앙에서 실시하는 초시를 관시라 하였다. 이는 시험을 주관하던 훈련관(訓鍊觀)에서 비롯한 이름이었다. 1466년 훈련관이 훈련원(訓鍊院)으로 개칭되면서 이름이 원시(院試)로 바뀌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무과를 실시하면서 과거삼층법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는 고려말에 도입된 것으로 향시(鄕試)에 합격해야 회시에 응시할 수 있으며, 회시에 합격해야 최종 시험인 전시에 오를 수 있게 만든 법이었다.

1402년(태종 2)에 무과를 처음 실시하면서 최초의 성문 법전인 『경제육전』의 무과법(武科法)에 따라 행하되 세부적인 내용은 기존 문과(文科)의 예에서 취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과거삼층법을 도입하였는데, 중앙에서 실시하는 향시를 특별히 관시라고 불렀다(『태종실록』 2년 1월 6일). 그것은 훈련관에서 시험을 주관한 것에서 기인하였다.

그런데 초시의 경우 합격자가 어느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배출되는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였다. 즉, 합격자의 지역 할당제를 정하여 전국 각지에서 골고루 선발되도록 하였다. 이때 중앙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관시, 외방에서 실시하는 것은 향시라고 불렀다. 그리고 전체를 한데 묶어서 초시라고 하였다. 따라서 관시는 초시 중 중앙에서 실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내용

1402년(태종 2)에 처음 실시된 관시의 선발 인원은 50명이었다. 그런데 1423년(세종 5) 병조에서 경기도의 향시 정원 40명이 너무 많다며 그중에서 20명을 감축해서 관시 정원에 합할 것을 청하였다. 그로 인하여 관시의 정원은 총 70명으로 늘었다(『세종실록』 5년 3월 21일). 그리고 3년 뒤에 문과의 경우 경기에서 향시 실시를 중단하였다는 이유로 무과의 그것도 똑같이 혁파해야 한다고 병조에서 건의하였고, 이는 곧바로 받아들여졌다(『세종실록』 8년 1월 14일). 그 이후 경기도 출신들이 무과 시험에 응시하려면 한양으로 올라와서 관시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정원에는 변동이 없었다. 한편 관시에 합격한 자들은 외방 향시의 급제자들과 함께 서울에 모여서 제2차 단계 시험인 회시에 응시하였다.

무과를 처음 실시하였을 때의 시험관은 무관(武官)으로 의정부(議政府)와 중추부(中樞府) 양부(兩府) 이상의 벼슬에 있는 자 2명을 택하여 1명은 감교시(監校試)로, 다른 1명은 동감교시(同監校試)로 삼았고, 나머지 인원은 문과의 예(例)에 따르도록 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3품 이하의 관원은 교시관(校試官)·동교시관(同校試官)이라고 하였으며, 병조 낭청(兵曹郞廳) 1명, 훈련관원 2명, 대간(臺諫)에서 각각 1명씩을 고시관으로 삼았다. 하지만 예전부터 전해 오던 폐습인 좌주문생(座主門生) 관계를 철폐한다는 명목으로 감교·고시·교시관제를 혁파하고 무과의 경우 훈련관에서 주관하되 병조와 함께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도록 하였으며, 대간으로 하여금 참고(參考)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3년 1월 6일). 그런데 1427년(세종 9)부터 문과 관시에 예조가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과 관시도 이에 의거해서 훈련관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주관하게 하였다(『세종실록』 9년 3월 4일).

시험 과목은 무예만으로 구성되었다. 1427년(세종 9) 무과 친시(親試)를 실시하면서 관시를 베풀었는데, 보사(步射) 150보, 기사(騎射), 농창(弄槍), 격구(擊毬)로 시험을 보았다(『세종실록』 9년 3월 3일). 『경국대전』에서는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 기창(騎槍), 격구 등으로 시험한다고 규정되었다.

한편 관시에 합격해서 회시에 응시하였다가 탈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재주를 시험해서 갑사(甲士)에 소속시키는 법이 있었다. 1429년(세종 11)부터 관시 합격자가 회시에서 떨어지면 재시험 없이 바로 갑사에 입속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1년 4월 9일). 하지만 회시에서 기사와 보사에 1발도 명중시키지 못한 자까지 서용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1450년(문종 즉위년)부터 기사와 보사에 모두 명중시키거나 보사 240보(步)에 1발 이상을 넘긴 자를 갑사에 임명하도록 개정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1월 3일).

변천

1466년(세조 12)에 훈련관을 훈련원으로 이름을 고쳤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이로 인하여 관시가 원시로 바뀌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원시는 훈련원에서 녹명(錄名)하여 시취하도록 하였다. 이는 훈련원에서 응시 자격을 심사해서 통과시켜야 시험을 볼 수 있음을 의미하였다. 선발 인원은 1423년에 정한 70명을 그대로 고수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무과총요(武科總要)』
  • 윤훈표, 「조선초기 무과제도연구」, 『학림』 9, 1987.
  • 이성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한국사 23-조선초기의 정치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94.
  • 심승구, 「조선전기 무과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