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동(芹洞)"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9일 (토) 22:5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근동 |
한글표제 | 근동 |
한자표제 | 芹洞 |
상위어 | 방어영(防禦營), 병영(兵營), 진(鎭) |
동의어 | 근동보(芹洞堡) |
관련어 | 육진(六鎭), 진보(鎭堡)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장소 | 함경도 경성부(鏡城府) |
규모(정면/측면/칸수) | 둘레 338척, 높이 5척 |
양식 | 토성(土城) |
관련 인물 | 우맹선(禹猛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근동(芹洞)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17년 6월 24일 |
조선시대 함경도 경성부에 설치되었던 군사시설 보.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진보가 설치되어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근동보가 소속돼 있는 경성부(鏡城府)는 1411년(태종 11) 3월에 경원진(慶源鎭)이 폐지된 후 경성에 새롭게 진을 설치하여 길주(吉州) 이남의 군사들로 부방하게 하면서 군사지역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 뒤 세종대에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 등 육진(六鎭) 지역이 개척되면서 본격적으로 방어체제가 정비되었다. 경성부에는 어유간보(魚游澗堡)·주을온보(朱乙溫堡)·삼삼파보(森森坡堡)·오촌보(吾村堡)·보로지책(甫老知柵)·보화덕책(甫化德柵)·근동보(芹洞堡) 등의 군사시설이 있었는데, 근동보는 이 중에서도 가장 후기에 경성부 북쪽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다.
위치 및 용도
경성부 중심에서 북쪽으로 67리(약 26㎞)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경성부 북쪽으로는 오촌보(吾村堡)·어유간보(魚游澗堡) 등이 도로변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는데, 근동보는 이들보다도 더 북쪽으로 나아가 육진 중 하나인 부령 근처에 설치되었다.
근동보와 같은 진보는 기본적으로 함경도 최전방과 내지의 요충지에서 실질적인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시설이었다. 진보는 적 침입 시 일차적인 방어처로서 각지에 있는 봉수와 파수를 관리하였다. 근동보가 소속된 경성부는 육진 지역의 후방을 책임지는 곳으로서 육진이 군사적 침입을 당했을 경우 서울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적의 공세를 지연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근동보는 경성부와 부령군의 중간에 위치하여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내지 간 연락을 주고받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전기 근동보는 농사철 이민족의 도적질을 방어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1522년(중종 17) 함경도절도사우맹선은 외적들이 들어와 농민들을 약탈하는 문제에 대한 계책을 건의하면서 보화보(甫化堡)를 근동보의 예와 같이 본도의 군관들로 하여금 적절히 헤아려 군사를 거느리고 농사철 동안만 지키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중종실록』17년 6월 24일). 이 기사의 내용으로 볼 때 근동보는 이미 보화보에 앞서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운영은 본도의 군관과 군병들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서 농사철 동안만 한시적으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1481년(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기록되지 않고, 1530년(중종 25)년 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포함된 것으로 보아 성종과 연산군 재위 기간에 새롭게 설치된 보(堡)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법전과 지도 등에서 그 지명을 찾기 어려운 것으로 보아 육진 지역이 안정되면서 한시적으로 운영되던 근동보는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
근동보는 토성의 형태로 둘레는 338척(약 102m), 높이는 5척(약 1.5m)이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