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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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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거양성 |
한글표제 | 거양성 |
한자표제 | 巨陽城 |
관련어 | 개양(開陽), 윤관(尹瓘)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건축 |
지역 | 중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박정민 |
관련 인물 | 양목답올(楊木答兀), 유성(庾誠), 윤관(尹瓘), 왕가인(王可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거양성(巨陽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4년 2월 6일, 『태종실록』 5년 4월 20일, 『태종실록』 4년 4월 4일, 『세종실록』 13년 5월 23일, 『세종실록』 13년 9월 15일, 『성종실록』 8년 6월 9일, 『성종실록』 8년 6월 9일 |
두만강 이북 현성(縣城)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250리 지점에 위치한 성.
개설
거양성(巨陽城)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훈춘시(琿春市) 동북부에 위치한 성으로 보인다. 이곳의 축성 연대 및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거양성 안의 종과 유성(庾誠)에 관한 설화가 남아 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거양성을 중국 요녕성(遼寧省) 개원시(開原市)의 개양성(開陽城)과 혼돈하여 기재되었다.
위치 및 용도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두만강 건너 10리(약 4㎞) 되는 넓은 들 가운데에 현성이 있고, 이를 기준으로 거양성의 위치를 파악하였다. 즉, 현성의 북쪽으로 90리(약 35㎞)의 어라손참(於羅孫站), 그 북쪽으로 30리(약 11.8㎞)에 허을손참(虛乙孫站), 그 북쪽으로 60리(23.6㎞)에 유선참(留善站)이 있으며, 그 동북쪽으로 70리에 토성기(土城基)가 있으니, 곧 거양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성을 제외하고 다른 지명의 위치를 알 수 없어서 거양성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선춘현(先春峴)이 있고, 윤관이 비석을 세운 곳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즉, 윤관이 동북 9성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세운 ‘선춘령 비’라고 적시한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는 거양성을 윤관이 축조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 도호부].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위와 동일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에서 고려시대 윤관이 개척한 선춘령(先春嶺)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파악한 것이므로, 윤관이 축성한 동북 9성의 위치를 비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변천 및 현황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거양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두만강 북쪽에 있는 성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요녕성 개원시에 있는 거양이었다. 즉, 『세종실록』 「지리지」의 내용과 1414년(태종 14) 2월에 명에서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립하면서 거양성과 훈춘성 등을 쌓고, 여기에 여진인을 채워 넣으려고 한다는 보고(『태종실록』 14년 2월 6일)를 제외하고 모두 후자를 의미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거(巨)는 개(開)로 쓴 곳도 있다.”는 구절을 통하여 거양성과 개양성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태종대에 동북면(東北面) 여진인 귀속 문제로 명과 외교 분쟁이 있었다. 영락제(永樂帝)는 여진인 초유를 위하여 이 지역에 왕가인(王可仁)을 사신으로 보냈다. 이때 왕가인이 거양 사람 20여 명과 함께 혐진(嫌進)과 골간올적합(骨看兀狄哈)을 초유하였다(『태종실록』 5년 4월 20일). 왕가인은 1404년 3월에 칙서를 받고 한양에 올 때, 요동천호(遼東千戶)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태종실록』 4년 4월 4일). 따라서 그는 요동의 개원에 거주하였고, 그가 거느리고 온 거양인 20여 명은 그의 관하인일 가능성이 컸다.
1423년(세종 5)에 양목답올(楊木答兀)이 개양성(開陽城)을 약탈한 후,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따라 두만강 일대에 이주하였다. 이때 양목답올은 개양의 백성들을 많이 데려왔다. 후일 그로부터 도망친 인물들이 자신들은 거양성에 왔다고 주장하였고, 그들의 거취에 대한 의논을 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세종실록』 13년 5월 23일)(『세종실록』 13년 9월 15일)(『성종실록』 8년 6월 9일)(『성종실록』 8년 6월 9일).
관련사건 및 일화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거양성에 관한 설화가 있다. 즉, 거양성 종(鍾)과 유성에 대한 설화였다. 거양성 안에 높이가 3척(약 1m), 지름이 4척(약 1.2m)인 큰 종을 달던 돌기둥이 있었다. 일찍이 경원(慶源)의 유성이란 사람이 거양성의 종을 가져 오려고, 그 종을 부수었다. 종이 너무 커서 말 9마리에 싣고 왔지만, 겨우 1/10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유성을 따라갔던 사람 30여 명이 모두 죽었다. 이 때문에 그 나머지 쇠붙이는 풀숲 가운데 버려져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가져가지 못하였다고 한다[『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 도호부].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박원호, 『明初朝鮮關係史硏究』, 일조각, 2002.
- 김구진, 「公嶮鎭과 先春嶺 碑」, 『백산학보』 21, 1976.
- 남의현, 「元末明初 朝鮮・明의 요동쟁탈전과 국경분쟁 고찰」, 『한일관계사연구』 42, 2012.
- 박정민, 「태종대 제1차 여진정벌과 동북면 여진관계」, 『백산학보』 80, 2008.
- 유재춘, 「麗末鮮初 朝·明간 女眞 귀속 경쟁과 그 意義」, 『한일관계사연구』 42, 2012.
- 王臻, 「朝鮮太宗與明朝爭奪建州女眞所有權述論」, 『延邊大學學報』, 社會科學版 36-3,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