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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7 기준 최신판



황해도 은율과 신천 사이에 있는 석축 산성.

개설

황해도 은율과 신천 사이에 있는 높이 945미터의 구월산을 둘러싼 산성으로 고려 때 처음 축성되었다고 한다. 『고려사』「병지(兵志)」에 의하면 1012년(현종 3)에 거란족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궁을산(弓乙山)에 쌓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궁을산이 구월산이다. 이 성은 현의 치소(治所)에서 북쪽으로 40리(약 16㎞)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당시에는 여장(女墻)이 321개나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들어 구월산성을 크게 수축하였는데 이후 수성장(守城將)은 은율현감이 겸임하고 별장(別將) 1인을 두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재침략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정묘호란 직후인 1628년(인조 6) 9월 장신 등이 구월산성을 축조할 것을 건의하였고(『인조실록』 6년 9월 15일), 이후 황해도 방어 강화를 위해 1631년(인조 9) 장수산성(長壽山城)과 함께 구월산성을 다시 개축하였다(『인조실록』 9년 3월 22일). 이후에도 황해도 지역 해안 방어를 위해 구월산성의 군사적 중요성은 적지 않았다.

위치 및 용도

구월산성은 주변에 황해도의 평야가 펼쳐져 있어 산에 올라서면 동남쪽으로 안악, 신천, 재령 등의 평야 지대와 서북쪽으로는 넓은 황해와 평안남도의 남포까지도 시야에 들어온다. 아울러 바닷길로 평안도와 통하는 교통의 요충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의미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서해안을 통해 황해도의 내륙으로 들어오는 적군을 막는 역할을 하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특히 조선후기 해안 방어의 중요성이 점차 증가하면서 구월산성의 군사적 중요성도 매우 커졌다.

변천 및 현황

조선초기에 성을 한 차례 개축하였고 이후 17세기 초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정묘호란 직후인 1628년(인조 6) 황해도의 장수산성과 함께 구월산성을 다시 개축하였다. 조선후기 구월산성의 규모는 그 길이가 14,366보(약 30㎞)이며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성의 높이는 2장(약 6m)에 달하였다.

형태

조선초기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구월산성은 은율 북방 10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둘레는 14,386자(약 4.4㎞)이었고 그 높이는 1.5장(4.5m)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 형태가 큰 배와 같았다고 한다. 남북으로는 통행로가 없으며 다만 동서로 구름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지형은 성의 양편이 깎아 세운 듯이 우뚝 솟아 마치 문의 모양 같은 산이 있고 성안에는 나무를 묶어 세운 듯이 매우 산림이 울창하였다. 따라서 수량이 풍부하여 모든 골짜기에서 나오는 물이 성문 밖으로 흘러나가 폭포가 되는 실로 천연의 요새라고 할 것이다. 성안에는 우물이 네 곳 있었으며 시냇물이 두 줄기 있었다. 또한 창고로서 좌우에 군창(軍倉)이 좌창은 문화, 신천, 안악에 속하였고, 우창은 은율, 풍천, 송화, 장연, 장련에 속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병자호란 이후에도 군사적 중요성이 증가하였는데, 특히 18세기 초부터 해안으로부터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국 선박인 황당선(荒唐船) 등의 침입 가능성으로 인해 구월산성의 중요성은 이전보다 더 커졌다. 18세기 후반 군사 관련 서적인 『풍천유향』에 의하면 황해도 방어를 위해 구월산성과 태백산성을 중시하여 먼저 구월산성 방어를 위해 은율, 풍천, 송화, 장연의 병력을 모아 박석산(朴石山)을 차단하고 안악, 장련의 병력으로 대진, 우이포를 담당하여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막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풍천유향(風泉遺響)』
  • 고승희, 「조선후기 황해도 내지 방어체계」, 『한국문화』38, 규장학한국학연구소, 2006.
  • 백기인, 『조선후기 국방론 연구』, 혜안,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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