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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7 기준 최신판



창덕궁 대보단의 중문.

개설

대보단(大報壇)은 황단(皇壇)이라고도 불린 제사 시설로 창덕궁 서북쪽에 위치하였다. 1704년(숙종 30)에 예조(禮曹) 판서(判書)민진후(閔鎭厚)가 발의해서 건립한 단으로 임진왜란 당시 군병을 보내 조선을 도운 명나라 신종(神宗)을 향사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곳에는 별대영(別隊營)의 고사(庫舍)가 있었는데 예조(禮曹)와 공조(工曹)에 명해 이를 철거하고 단유(壇壝)를 건립했다. 북쪽에는 단을 쌓았고 남쪽으로 중문과 남문을 두었으며 동문으로 조종문(朝宗門)을 설치했다. 숙종대에는 동문인 조종문만 이름을 갖고 있었고 중문과 남문은 따로 이름이 없었다. 1745년(영조 21)에 영조가 대보단 남문에 따로 이름이 없으므로 원경하(元景夏)에게 이름을 짓도록 했다. 그 결과 대보단 남문의 명칭을 공북문(拱北門)이라고 지어 편액을 내걸었다(『영조실록』 21년 3월 7일).

1749년(영조 25)에는 대보단 중수가 있었다. 숙종대에는 대보단에 신종의 위패만 봉안했다. 이때 신종 외에 명나라 태조(太祖)와 의종(毅宗)을 같이 제사 지내기로 결정하면서 대보단의 규모가 훨씬 커지게 됐다. 중수를 진행하면서 대보단 중문에 따로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새로 이름을 짓게 하여 열천문(冽泉門)이라고 했다. 당시의 대보단 중수와 열천문 현판 조성에 대한 내용은 『대보단증수소의궤(大報壇增修所儀軌)』에 자세히 전한다. 이때 만들어진 열천문 현판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열천은 『시경(詩經)』「하천(下泉)」의 ‘차갑게 흘러내리는 저 샘물[洌彼下泉]’에서 인용한 것으로 주나라의 태평성대를 그리워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따라서 열천문이라는 이름은 명나라가 망해 조선이 힘들고 어려워졌다는 뜻으로 명나라를 그리는 뜻이 담겨 있다.

내용

열천문은 3칸으로 어칸은 신문(神門)으로 사용했고 신문 좌우에는 협문(挾門)을 두었다. 1749년(영조 25)에 영조가 직접 대보단에 친제를 한 내용에 따르면, “왕이 열천문 밖에 이르러 여(輿)에서 내려 열천문의 동쪽 협문을 통해 소차(小次)에 들어갔다.”고 했다(『영조실록』 25년 4월 11일). 이를 통해 어칸이 신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 연간에는 대보단에서 치른 망위례(望位禮), 망배례(望拜禮)를 열천문에서 거행했다는 내용이 많이 있다(『정조실록』 12년 3월 2일)(『정조실록』 12년 7월 19일). 대보단에서 거행하는 의식에 따라 열천문 안쪽에서 치르는 경우와 열천문 밖에서 치르는 경우가 있었다. 1788년(정조 12)에는 대보단에 제사를 지낼 때 명나라 사람의 자손과 충신의 자손 중에서 참여하는 사람의 반차에 대해 특별히 지시한 일도 있다. 원래 이들은 모두 공북문 밖에서 의식에 참여했는데 이때부터 열천문 안에서 의식을 치르게 했다(『정조실록』 12년 3월 2일). 공북문과 열천문은 의식을 치르는 데 매우 중요한 반차의 기준이었다.

참고문헌

  • 『대보단증수소의궤(大報壇增修所儀軌)』
      1. 그림1_00017955_「동궐도」, 창덕궁 대보단 열천문·공북문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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