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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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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운총보 |
한글표제 | 운총보 |
한자표제 | 雲寵堡 |
관련어 | 갑산(甲山), 영파보(寧波堡), 만호(萬戶), 망사(望祀), 백두산(白頭山), 진보(鎭堡)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김만호 |
장소 | 함경북도 갑산 |
관련 인물 | 김희조(金希祖), 맹상현(孟尙賢), 한명회(韓明澮), 허숙(許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운총보(雲寵堡)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3년 6월 20일, 『세조실록』 12년 윤3월 10일, 『성종실록』 18년 3월 20일, 『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
함경북도 갑산도호부에 속한 만호진(萬戶鎭).
개설
운총보는 관방시설로, 처음에는 종9품인 권관(權管)이 맡았으나 세조대에는 만호(萬戶)가 설치되었다. 세종대에 폐지된 영파보를 세조대에 운총보로 옮겼으나, 고종대에는 운총보를 혜산진(惠山鎭)에 합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북한의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5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 및 용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운총보가 갑산도호부의 북쪽 80리(약 31.4㎞)에 있다고 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운총보는 관아의 북쪽 80리에 있으며, 북쪽 7~8리에는 혜산진이 위치해 있다.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에 따르면 당시 함경도관찰사였던 남구만은 1673년(현종 14) 12월에 감평보(甘坪堡)와 운총보(雲寵堡) 사이에 옛 운총보의 터가 있는바 바로 적이 침입하는 요충지로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인데, 감평보와 운총보의 형세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곳은 새로 설치하는 곳과 달리 보(堡)와 성(城)의 형태가 있고 또 인가와 농지가 있으니, 동인보(同仁堡)를 이곳에 옮겨 설치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는 상소를 올렸다.
『국조보감』에 따르면 1767년(영조 43) 7월 정평(定平)의 비백산(鼻白山)에 드리던 북악(北嶽)의 제사를 백두산(白頭山)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영조는 함경도관찰사에게 명하여 운총보 북쪽 망덕평(望德坪)에 땅을 골라 각(閣)을 세워 백두산에 망사(望祀)를 지내도록 했으며 비백산의 제사도 파하지 말도록 하였다. 운총보는 관방시설일 뿐만 아니라 백두산에 제사를 지내는 데에도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북한 양강도 혜산시 운총리에 소재하고 있다.
변천 및 현황
1457년(세조 3) 6월 함경도 갑산(甲山)의 운총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요청한 내용에 따르면, 그들은 운총 지역은 본래 내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보(堡)가 설치되고 그에 따라 입보(入保)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농사철에 10리(약 4㎞)나 20리(약 8㎞) 되는 거리의 땅을 왕래하면서 농사를 해야 했으므로 불편이 많았고 농사도 부실해졌다. 그래서 상언을 올렸던 것이다. 병조에서는 함경도관찰사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했는데, 운총 거주민들로 하여금 전처럼 내지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했다(『세조실록』 3년 6월 20일). 이를 보면 1457년 이전에 운총보를 설치했지만, 지역민들의 반대로 유명무실화되었던 것 같다.
1466년(세조 12) 윤3월에는 운총보가 갑산군과의 거리가 90여 리(약 35㎞)로 멀고 고단하지만 북방의 도적들이 다니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방어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이에 한명회는 겨울철에 갑산군의 절제사가 운총보에 머물러 방어하고, 운총보를 권관이 아니라 만호가 관할하도록 의견을 내었고, 세조도 이에 동의하였다(『세조실록』 12년 윤3월 10일).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운총보의 위치가 한 번 옮겨진 것 같다. 1487년(성종 18) 3월 영안도축성순찰사(永安道築城巡察使) 홍응(洪應)의 보고에 따르면, 운총보의 옛터는 고단하고 멀어서 지킬 수 없는 땅이고, 지금 보를 설치한 곳은 토지가 비옥하여 살기는 마땅하나 수세(水勢)에 충파(衝罷)되어 인물(人物)이 번성하지 못한다고 했다. 때문에 홍응은 운총보를 예전과 같이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성종실록』 18년 3월 20일). 당시 성종이 이에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운총보의 위치는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을 것이다.
1579년(선조 12) 10월 23일 자 김성일(金誠一)의 『북정일록』에 따르면 운총보는 시냇가에 위치해 있으며, 전토도 농사짓기에 알맞아서 토병이 모두 부유하다고 하였다.
영파보는 1444년(세종 2)에 없어졌고, 1461년(세조 7)에 운총으로 옮겨 설치했다고 한다. 1883년(고종 20) 11월 23일 운총보는 혜산진(惠山鎭)에 합쳐지게 되었다(『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형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운총보는 석축으로 둘레가 1,467척(약 444.5m)이며, 높이는 9척(약 2.7m)이다. 『조선향토대백과』에 따르면 운총보는 운총강 기슭을 따라 축성된 원형 포성이다. 둘레의 길이는 1,050m이며 높이는 3m이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북정일록(北征日錄)』
- 『약천집(藥泉集)』
- 『여지도서(輿地圖書)』
- 『동전고(東典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평화문제연구소 편, 『조선향토대백과』, 평화문제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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