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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6 기준 최신판



정묘호란 때 능한산성을 중심으로 정주, 곽산 등의 군민이 후금의 군대와 전투한 곳.

개설

평안도 곽산군에 있는 높이 412m의 능한산에 있는 산성으로 993년(고려 성종 12)에 서희가 거란과의 1차 전쟁 직후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크게 축성하였다. 조선초기 문종대 북방의 위협이 나타나자 능한산성의 방어체계를 다시금 정비하였다. 이후 광해군대 후금의 위협이 본격적으로 나타나자 1620년(광해군 12)에 능한산성을 개축하여 북방 방어의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당시에는 정주, 선천, 곽산 등의 군민들이 능한산성에서 후금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성이 함락되고 군민들은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현재도 능한산성은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위치 및 용도

능한산성은 성의 서남쪽에 곽산읍을 중심으로 넓은 농토가 펼쳐져 있으며 그 끝에는 서해가 바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서북지역 교통의 요지로서 동쪽으로는 정주(定州), 서쪽으로는 성천(成川), 북쪽으로는 구성(龜城)으로 통하는 길이 열려 있다. 군사적으로 보면 의주와 안주의 중간 지역에 위치해 있어 북에서 남하하는 세력을 저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선후기 해안 방어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면서 구월산성의 군사적 중요성도 매우 높아졌다.

변천 및 현황

능한산성 터에서 고구려 시기의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으며 성을 쌓은 지형, 축성 흔적 등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에 최초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초 서희의 대규모 축성 이후 북방의 주요 거점으로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초기에 성을 한 차례 개축하였다. 조선초기 능한산성은 둘레 6,913자(약 2.1㎞), 높이 13자(약 4m)의 석축 성으로 성안에는 23곳의 우물과 1개소의 연못, 그리고 군창(軍倉)이 있었다. 그리고 산성 수비군으로 수첩군(守堞軍) 1,0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17세기 초인 1620년부터 1년여에 걸쳐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크게 개축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9월 8일). 정묘호란 시기 곽산 등지의 조선 군민은 이 성에서 농성하면서 후금군의 공격을 막다가 성이 함락되면서 전멸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발발 직전인 1636년(인조 14) 7월에 능한산성은 부원수의 거점으로 역할이 논의되는 등 군사적으로 중요성이 인식되기도 하였으나[『『인조실록』 14년 7월 23일 1번째기사], 병자호란 이후 중요성은 이전에 비해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현재 평안북도 곽산군 곽산읍에서 동북쪽으로 약 7리(약 2.7㎞) 떨어진 곳에 잘 보존되어 있다.

형태

현재 남아 있는 능한산성은 능한산의 주봉에서 시작하여 능한골, 해룡천 등 골짜기를 품고 있는데 전반적인 지형은 동북쪽이 높고 서남쪽이 낮다. 전체적으로 마치 광주리를 기울여 놓은 형태를 띠고 있다. 북쪽과 동쪽의 성벽은 주로 험준한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고 서쪽과 남쪽의 성벽은 경사진 능선을 따라 쌓았는데 둘레는 2.8㎞ 정도이다. 현존하는 성벽의 높이는 4~6m, 밑의 너비는 6m 정도이며 성벽 위에는 성가퀴의 흔적도 남아 있다. 성벽은 북쪽과 남쪽의 경우는 안쪽으로 조금 경사지게 하면서 면과 선을 맞추어 쌓아 올렸고 북쪽과 남쪽은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흙을 파 쓴 자리에 깊고 넓은 웅덩이가 남아 있다. 성문은 동, 서, 남 세 곳에 있으며 북쪽에는 비밀 통로인 암문(暗門)이 있다. 아울러 동문과 서문에는 ‘ㄷ’ 자 형태의 옹성(甕城)도 남아 있다. 장대는 동, 서, 남, 북 4면에 두었는데 북장대가 제일 높고 전망이 좋은 곳으로 성 안팎이 한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멀리 서해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성안에는 현재 병영 터 및 군기 창고 터와 식량창고가 남아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27년(인조 5) 1월 압록강을 건너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자 이 소식을 접한 선천부사기협(奇協), 곽산군수박유건(朴有健), 정주목사김진(金搢)은 자기 지역의 군민을 거느리고 능한산성으로 집결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후금군은 능한산성의 주변 지역을 점령하여 주변 군현과의 연락을 차단하였다. 1월 15일 오후 포위망을 구축한 후금군은 조선군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조선군이 이를 거절하자 오후부터 곧바로 전면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조선군의 저지로 격퇴되었다. 그러나 후금군은 그날 밤 야음을 틈타 능한산성 후면의 계곡으로 1,000여 명의 병력을 우회시켜 북문을 기습하여 돌파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크게 혼란에 빠졌고 이를 틈타 후금군이 전면 공격을 가하여 능한산성은 함락되고 정주목사김진 등은 항복하였고 선천부사기협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풍천유향(風泉遺響)』
  • 『여지도서(輿地圖書)』
  • 고승희, 「조선후기 황해도 내지 방어체계」, 『한국문화』38,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6.
  • 노영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내지 거점방어체계」, 『한국문화』3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서일범, 「서희가 축성한 성곽과 청천강 이북 방어체계」, 『서희와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 학연문화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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