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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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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북한행궁 |
한글표제 | 북한행궁 |
한자표제 | 北漢行宮 |
대역어 | 북한산성행궁(北漢山城行宮) |
동의어 | 양주행궁(陽州行宮) |
관련어 | 경리청(經理廳), 보장처(保障處), 북성(北城), 북한산성(北漢山城), 산성사고(山城史庫), 숙소참(宿所站), 주정소(晝停所), 주정참(晝停站), 총융청(摠戎廳), 행궁영건청(行宮營建廳), 행재소(行在所), 행행(幸行) |
분야 | 왕실/왕실건축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왕무 |
장소 | 북한산성 내부 |
규모(정면/측면/칸수) | 내전과 외전의 120여칸 |
관련 인물 | 숙종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북한행궁(北漢行宮)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36년 10월 16일, 『숙종실록』 37년 8월 29일, 『고종실록』 16년 8월 29일, 『고종실록』 30년 5월 18일, 『영조실록』 48년 4월 10일 |
숙종대에 북한산성 내부에 설치했던 왕의 행궁.
개설
1711년(숙종 37)에 도성 방어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북한산성(北漢行宮)을 축조할 때 건립한 행궁이다. 대개 왕이 궁궐에서 벗어나 외부의 숙소에서 임시로 숙박 혹은 경숙(經宿)하는 곳이 행궁이다. 왕이 도성 내외를 막론하고 숙소로 한 번 결정하면 행궁의 명칭을 부여받았다. 왕이 어떤 곳에 행(幸)한다는 의미 자체가 그곳을 행궁으로 만드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왕이 도성 내에서는 보위에 오르기 전의 잠저 혹은 공주나 부마 등의 왕족 처소에 행행하였으므로 행궁으로 삼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도성을 벗어나 원거리를 행행하는 능행, 원행, 강무, 온행 시에 임시로 숙소를 만들거나 관사를 이용하면서 행궁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런데 왕은 행궁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고위 관원이나 지역 관장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행궁은 왕의 임시 처소로서 항구적인 궁의 역할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왕이 행행한 지역의 행정 명칭을 붙여 지칭하는 것이 많았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외침을 당해 왕이 임시로 피신하면서 이용한 곳이나 미리 왕실의 보장처에 행궁을 마련하면서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행궁은 시대에 따라 설립 배경에 차이가 있으며, 그 용도와 규모도 구별되었다.
북한행궁은 도성 방어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건립한 것이므로 외침이나 긴급 상황이 아니면 왕이 평소에 거처할 일이 없는 곳이었다. 특히 숙종대는 청나라가 삼번의 난을 진압하는 시기를 거치면서 대외적인 안보 위기에 민감했다. 또한 국방 정책은 물론 정치적인 안배에서도 임진왜란과 두 번의 호란을 거치면서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상황이 연출되었기 때문에 민심을 수습하고 체제를 안정시키는 방안으로 여민공수(與民共守) 같은 도성 방어 전술의 채택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동시에 행궁을 그 안에 둔 것은 왕이 도성과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과 동시에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정권의 정통성을 살리는 방안이었다.
위치 및 용도
북한행궁은 북한산성 내 상원봉(上元峯) 아래에 위치하며 북한산성의 동장대가 바라보이는 동북향이었다. 무엇보다 북한산성은 천연의 험지이면서 도성에서 가까워 행궁 설치에 유리하였다(『숙종실록』 36년 10월 16일). 북한행궁의 제도와 배치는 남한산성 행궁의 예를 따랐다. 1711년(숙종 37) 9월 2일에 행궁 건립을 주관하던 호조 판서김우항(金宇杭)이 총체적인 운영을 위해 영건청(營建廳)이나 영건소(營建所)를 두자고 하면서 행궁의 제도는 남한산성의 행궁 제도를 모방해야 한다고 하였다. 좌의정김창집(金昌集)은 행궁영건청(行宮營建廳)이라는 명호(名號)를 두자고 하였다(『숙종실록』 37년 8월 29일). 북한행궁의 용도는 남한행궁과 동일한 것으로 외침이나 긴급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왕이 피난하기 위한 보장처의 기능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변천 및 현황
1879년(고종 16)에 홍수로 행궁과 공해(公廨)들이 무너져서 개축 논의가 있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고종실록』 16년 8월 29일). 1893년(고종 30) 경리청(經理廳)에서 행궁과 성첩(城堞), 공해를 중수하고 보축(補築)하였다(『고종실록』 30년 5월 18일). 이런 과정을 거쳐 1902년(광무 6)까지 대부분의 행궁 건물이 유지되었으며, 1912년에는 영국교회가 10여 년간 건물을 대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5년의 대홍수로 행궁의 일부가 유실되었고 이후 해체되어 사라졌다. 2014년 행궁지의 발굴이 진행되었다.
형태
『북한지(北漢誌)』와 『만기요람(萬機要覽)』에 기재된 행궁의 규모는 내전과 외전으로 크게 구분된다. 행궁은 경사진 대지를 3단으로 나누어 구성하였고, 전체적으로는 외전을 중심으로 하는 축에 따라 배치하였다. 내전은 28칸으로 좌우 상방(上房)이 각각 2칸, 대청이 4칸, 4면의 퇴(退)가 18칸, 좌우 행각방(行閣房)이 9칸, 청(廳)이 5칸, 중문(中門)이 1칸, 측소(厠所) 2칸이었다. 외전도 28칸으로 체제는 내전과 같았다. 이외에 대문 3칸, 북협문(北俠門) 1칸, 북장(北墻) 밖의 중문 1칸, 행각방 밖의 12칸, 누(樓) 4칸, 청 4칸, 허간(虛間) 2칸, 중문 2칸, 외대문 3칸, 북변(北邊)의 외대문 1칸이다. 내외전과 부속건물을 모두 합하면 120여 칸이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72년(영조 48) 4월에 영조는 80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동장대를 거쳐 행궁에 행차했다가 야간에 환궁했다. 연잉군(延礽君) 시절이던 1712년(숙종 38) 4월에 숙종과 같이 행궁에 갔던 것을 추모해 동일한 월일에 행차한 것이다(『영조실록』 48년 4월 1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북한지(北漢誌)』
- 육군본부, 『한국군사사』1-16 , 경인문화사, 2012.
- 나경준, 「조선 숙종대 관방시설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노영구, 「17~18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조선의 도성 수비체제 이해의 방향」, 『조선시대사학보』71, 2014.
- 박세연, 「17세기~18세기 전반 僧軍의 확대와 調發방식의 변화」,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 백종오, 「조선후기 북한산성의 축성과 운영체계」, 『한국사학보』50, 2013.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 최효식, 「摠戎廳 硏究」, 『논문집』4, 동국대학교, 198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