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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6 기준 최신판



1665년(현종 6) 현종이 온양에 온행을 다녀오면서 그 여정에 있던 충청도직산행궁에 머물다가 세우게 한 정자.

개설

영소(靈沼)는 『시경(詩經)』의 “왕이 영소에 계시니, 고기들이 가득히 뛰노는구나[王在靈沼於牣魚躍]”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나라 문왕(文王)이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이 왕의 연못을 영소라 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영소정(靈沼亭)이라는 이름에는 왕이 선정을 펼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영소정은 1665년(현종 6) 4월부터 5월 사이에 현종이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에 행차했다가 귀경하면서 직산에 묵을 때 세운 것이다. 영소정이 위치한 직산은 경기도를 벗어나 충청도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다. 현종이 직산에서 묵은 행궁은 객사였는데, 영소정은 그 동쪽에 있었다. 현종은 행궁에 묵으면서 인근의 연못에 갔다가 내관(內官)에게 연꽃의 씨를 뿌리게 했는데, 그 후 모두 싹이 났다고 한다. 당시 현감이었던 윤취은(尹就殷)이 그것을 기념하여 영소정을 창건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집에는 직산인들이 자진해서 모여 10개월 내에 낙성했다고 하며 윤취은이 정자 이름과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청해서 지어 주었다고 한다. 다만 영소정에 걸린 현판은 숙종의 어제였다.

위치 및 용도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에 있었던 행궁의 부속물이다.

변천 및 현황

1666년(현종 7) 현종이 정자 위에 올라서 기문을 직접 읽다가 안질(眼疾)로 끝까지 읽을 수가 없어서 궁인(宮人)에게 각판(刻板)을 떼어 내리라고 하였는데, 네 귀퉁이에 큰 못이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현종이 등본(謄本)이 따로 있느냐고 묻자 윤후가 인출(印出)한 등본 한 장을 들여보냈고, 현종이 읽은 다음 상자에 담아 궁인에게 보관하도록 했다.

현종 이후 1717년(숙종 43), 1720년(숙종 46), 1760년(영조 36)에 각각 왕실 행차가 있었다. 1717년(숙종 43)에 숙종이 안질을 고치기 위해 온양에 행행하고 귀경하다가 직산행궁에 묵으면서, 영소정과 천안의 화축관(華祝館)은 현종이 온천에 거둥할 때에 지은 것이므로 사객이 머물지 못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 43년 4월 2일). 또한 호종한 신하들과 영소정에 대한 44수의 시문인 『직산영소정어제시갱화첩(稷山靈沼亭御製詩賡和帖)』을 남겼다.

『황성신문』에 의하면 영소정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시기에 해체되어 1909년(융희 4)에는 연못만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영소정은 행궁의 동쪽에 있었는데, 현재는 그 위에 초등학교가 세워져 있다.

형태

연못 위에 설치한 정자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96년(정조 20) 11월에 퇴락한 영소정의 수리를 위해 안면도의 재목을 아산(牙山) 공진창(貢津倉)에서 조선(漕船)에 실어 운송하다가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온궁일기(溫宮日記)』
  • 『온행등록(溫幸謄錄)』
  • 『이계집(耳溪集)』
  • 『직산영소정어제시갱화첩(稷山靈沼亭御製詩賡和帖)』
  • 『황성신문(皇城新聞)』
  • 『읍지 충청도―온양군읍지』, 아세아문화사, 1984.
  •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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