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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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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삼축당 |
한글표제 | 삼축당 |
한자표제 | 三祝堂 |
상위어 |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 |
관련어 | 고종(高宗), 김옥기(金玉基), 순종(純宗), 특별상궁(特別尙宮), 후궁(後宮) |
분야 | 왕실/왕실건축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대한제국기 |
집필자 | 신명호 |
장소 | 경운궁(慶運宮) |
규모(정면/측면/칸수) | 정면 6칸/측면 2칸 |
양식 | 민도리집 |
관련 인물 | 김옥기(金玉基)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삼축당(三祝堂) |
1906년(광무 10)에 경운궁의 함녕전 좌측에 건축된 건물 이름 또는 고종의 후궁인 김옥기(金玉基)의 당호(堂號).
개설
1895년(고종 32) 10월 8일에 고종은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명성왕후(明聖王后)를 시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4개월 후인 1896년(고종 33) 2월 11일에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했다. 고종은 파천하면서 왕태후 홍씨와 태자비 민씨를 러시아공사관에서 가까운 경운궁으로 옮기게 하였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한 직후 경운궁을 수리하도록 명령하였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는 중에도 경운궁에 나가 일본 공사들을 접견하곤 하다가 1897년(광무 1) 2월 20일에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때를 전후로 경운궁에는 수많은 건물이 들어섰는데, 삼축당도 고종의 환궁 후에 건축되었다.
그런데 1904년(광무 8) 4월 14일에 함녕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함녕전,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을 비롯하여 삼축당 등 수많은 건물이 불에 탔다. 함녕전 주변의 건물 중에서 화재를 모면한 것은 가정당, 돈덕전, 구성헌뿐이었다. 북서쪽의 후미진 곳을 제외한 전 지역이 불에 탄 것이다. 화재 당일 고종은 문안차 온 신료들을 만나 불탄 궁궐을 다시 중건하라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경운궁 중건공사가 대대적으로 거행되었는데, 삼축당도 그때에 중건되었다.
위치 및 용도
1904년의 화재 이후 중건되기 이전 삼축당의 위치나 용도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그 이후 중건된 삼축당은 영복당 뒤편에 있었다. 영복당은 당시 고종황제의 정실부인 역할을 하던 황귀비(皇貴妃) 엄씨(嚴氏)를 위한 공간으로서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의 동쪽에 있었다. 함녕전 동쪽에는 영복당을 위시하여 홍태후의 수인당과 동궁 및 삼축당, 복녕당, 광화당, 보현당 등 후궁들의 거처가 있었다. 후궁의 건물 중에서는 황귀비 엄씨의 영복당이 가장 컸다. 그 뒤로 자리한 삼축당, 복녕당, 광화당, 보현당 등은 영복당에 비해 건물도 작았고 중요성에서도 뒤쳐졌다. 그 이유는 물론 황귀비 엄씨가 고종의 정실부인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변천 및 현황
1906년(광무 10)에 건축된 삼축당에는 고종의 후궁인 김옥기가 살았다. 김옥기는 양반 출신으로서 1892년(고종 29)에 김순옥(金順玉)의 2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나 8세에 궁녀로 입궁하였다. 21세 되던 1912년에 고종의 승은을 입고 8번째 후궁으로 책봉되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후궁이었기에 고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자녀를 낳지 못해 특별상궁으로 머물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김옥기는 덕수궁 삼축당에서 나와 사간동 집에서 고종의 또 다른 후궁인 광화당(光華堂) 이씨(李氏)와 함께 살았다. 이때 순종은 법도를 깨고 아이를 낳은 후궁에게만 내리는 당호와 금반지를 내려 삼축당이라 부르게 하였는데, 김옥기가 덕수궁의 삼축당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19년 이후에는 삼축당이 덕수궁의 건물이 아니라 고종의 후궁인 삼축당 김옥기를 지칭하게 되었다.
삼축당 김옥기는 1970년 9월 23일에 서울세브란스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편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덕수궁은 크게 훼손되어 수많은 건물이 헐렸다. 이 와중에서 삼축당 역시 헐려나가 현재는 빈터만 남아 있다.
형태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에 의하면 삼축당은 1906년 11월에 건축되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방형기둥 위에 납도리를 결구한 민도리집이었다. 평주 14개와 고주 7개를 세우고 칸반량(間半樑) 7개를 사용한 것으로 적혀 있어 전면에 툇간을 두고 뒤는 칸반을 주간으로 잡은 간살이었다. 구조는 1고주 5량가로 짜고 처마는 홑처마를 구성하였다. 지붕은 상와(常瓦)를 올린 맞배지붕을 형성하였다. 실내는 온돌방, 마루, 툇간, 다락과 하부 함실아궁이로 나뉘었다. 온돌방은 동서에 있었으며 4칸 반으로 적혀 있어 마루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방을 둔 전형적인 침전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914년 3월 31일에 고종은 순종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삼축당에서 오찬을 베풀었다.
참고문헌
-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 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 일지사, 1987.
-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 정비 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 『경향신문(京鄕新聞)』
- 『동아일보(東亞日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