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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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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곤녕합 |
한글표제 | 곤녕합 |
한자표제 | 坤寧閤 |
상위어 | 경복궁(景福宮), 침전(寢殿) |
관련어 | 건청궁(乾淸宮), 장안당(長安堂)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조재모 |
장소 | 경복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곤녕합(坤寧閤)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10년 5월 10일, 『고종실록』 32년 8월 20일, 『고종실록』 13년 11월 4일, 『고종실록』 22년 5월 8일, 『고종실록』 22년 9월 13일, 『고종실록』 28년 11월 6일, 『고종실록』 28년 4월 27일, 『고종실록』 30년 10월 30일, 『고종실록』 10년 8월 19일, 『고종실록』 12년 9월 3일, 『고종실록』 32년 8월 20일 |
경복궁 건청궁의 장안당 동쪽에 있는 전각.
개설
곤녕합(坤寧閤)은 고종의 어진 봉안소를 핑계로 조성한 거처이자 집무실인 건청궁(乾淸宮) 일원에 속한 전각이다. 경복궁 향원정(香遠亭) 북쪽, 신무문(神武門) 안쪽에 있으며 장안당(長安堂)과 함께 건청궁을 구성한다. 1895년(고종 32)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서 시해되었다.
위치 및 용도
곤녕합이 속한 건청궁 일원은 고종 대에 경복궁 중건이 마무리된 후 1873년(고종 10)에 내탕고로 조성되었다(『고종실록』 10년 5월 10일). 외면적인 건립 이유는 고종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이었지만 이보다는 왕의 거처이자 집무처, 혹은 외교 사절을 맞는 곳으로 사용했다. 전체적으로 단청을 하지 않은 반가의 형식을 취하였다. 크게 장안당 영역과 곤녕합 영역을 중심으로 조성되었고, 서쪽에 각감청이 있었다. 장안당이 고종의 공간이라면 곤녕합은 명성황후의 공간으로 사랑채와 안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곤녕합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고종실록』 32년 8월 20일).
건청궁 일원에서는 대신(大臣) 소견(『고종실록』 13년 11월 4일), 외교관 접견(『고종실록』 22년 5월 8일)(『고종실록』 22년 9월 13일)(『고종실록』 28년 11월 6일), 산릉(山陵) 제문(祭文)의 친압(『고종실록』 28년 4월 27일), 조현례(朝見禮)(『고종실록』 30년 10월 30일) 등 고종의 다양한 업무가 행해졌다.
변천 및 현황
1873년(고종 10)에 건청궁 일원을 조성하였다. 외부에 알리지 않고 대내의 내탕고로 조성하였는데, 처음에는 고종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宙合樓)와 서향각(書香閣)을 모방하여 지었다(『고종실록』 10년 8월 19일). 이후 원래 수정전(壽靜殿)에 봉안되었던 어진과 교명, 책보를 건청궁 관문당(觀文堂)으로 옮겼다(『고종실록』 12년 9월 3일).
관문당은 이후 관문각으로 바뀌었다. 관문각은 1888년(고종 25) 1월부터 약 3년간의 공사를 통해 양관으로 조성되었다. 『승정원일기』 1891년(고종 28) 12월 30일의 기록에 관문각 개건 공사에 참여한 신하들에 대해 포상한 내용이 있다. 1876년(고종 13)에 경복궁 내전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해 궐내의 침전이 부족한 상황에서 건청궁의 장안당과 곤녕합이 주요한 침전으로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87년(고종 24)에는 조선 최초의 전등이 일대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곤녕합을 포함한 건청궁 일원은 1907년(융희 1)~1909년(융희 3)에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관문각은 건립 10년 만인 1901년(광무 5)에 훼철되었다. 1939년에는 건청궁 자리에 총독부미술관이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민속미술관·한국전통공예미술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1998년에 미술관을 헐고, 2006년에 건청궁을 복원하였다.
형태
곤녕합이 속한 건청궁 일원은 크게 5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고종이 신하들이나 외국 공사를 만나던 장안당, 왕비의 곤녕합, 어진과 서책을 보관하는 관문각, 복수당(福綏堂), 외행각이다. 건청궁 일곽의 남쪽 행각의 문을 통해 들어오면 첫 번째 마당이 있고, 서쪽으로 초양문(初陽門)을 지나면 장안당 영역이고, 북쪽으로 함광문(含光門)을 지나면 곤녕합 영역이다.
곤녕합은 장안당 동쪽에 깊숙이 조성되었다. 동쪽에 옥호루·사시향루(四時香樓)가 있고, 후면으로 정시합(正始閤)이라 이름 붙은 침방 4칸이 조성되었다. 옥호루 서쪽으로는 전면 퇴를 가진 방이 2칸, 대청이 2칸 연이어 있고, 그 서쪽으로는 서행각과 결합하여 방이 조성되었다. 사방으로 행각이 있어 남행각에 함광문, 동행각에 청휘문(淸輝門)이 있다. 곤녕합의 후면 마당에는 서쪽으로 장안당 뒤쪽 마당으로 연결되는 일각문이 있다. 북쪽으로는 복수당이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명성황후가 곤녕합에서 시해되었는데, 이때 45세였다(『고종실록』 32년 8월 2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 이철원, 『왕궁사』, 동국문화사, 1954.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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