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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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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현당 |
한글표제 | 경현당 |
한자표제 | 景賢堂 |
상위어 | 동궁(東宮), 세자궁(世子宮) |
관련어 | 경희궁(慶熙宮)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신지혜 |
장소 | 경희궁 |
규모(정면/측면/칸수) | 정면 3칸/측면 3칸/총 9칸 |
양식 | 목조, 다포계 팔작지붕 |
관련 인물 | 소현세자(昭顯世子), 숙종, 영조, 정조, 익종(翼宗)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현당(景賢堂)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51년 12월 8일 |
경희궁에서 왕세자가 경서를 강독하고 하례를 받는 동궁의 정당.
개설
경현당(景賢堂)은 왕세자가 공식적인 행사를 치를 때 활용하는 공간으로 동궁의 정당(正堂)에 해당된다. 영조가 지은 「경현당명병소서(景賢堂銘幷小序)」에 “창덕궁에는 시민당(時敏堂)이 있고, 경덕궁에는 경현당(景賢堂)이 있는데, 모두 세자가 경서를 강독하고 하례를 받는 정실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광해군이 경희궁을 건립할 당시 세자의 공식적인 행사를 위하여 조성한 것을 따른 것이다. 인조 때부터 세자의 회강례와 회강이 이루어졌으며, 숙종과 영조대에도 왕이 즐겨 사용하였다.
위치 및 용도
경현당은 본래 왕세자의 관례와 회강례, 회강을 위한 공간이다. 정조가 기록한 『홍재전서(弘齋全書)』「경희궁지(慶熙宮志)」에 ‘경현당내동궁수례지정당(景賢堂乃東宮受禮之正堂)’이라 하였다. 경희궁 동궁의 첫 주인이었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1625년(인조 3)에 경현당에서 관례와 회강례를 행하면서부터 동궁의 정당으로 사용되었다.
경희궁에서 왕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경현당은 청정의 장소로 규정되었다. 1717년(숙종 43)에 왕세자에게 대리청청을 맡길 때 경현당을 청정의 처소로 하고, 좌향은 서향으로 하도록 하였다. 이것을 전례로 하여 1775년(영조 51)에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할 때에도 이같이 행하였으며, 경현당에서 청정하례가 행해졌다(『영조실록』 51년 12월 8일). 경현당의 지리적인 위치가 볕이 잘 들고 뜰이 넓어서 왕이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숙종과 영조, 순조, 헌종은 경현당에서 강(講)을 하거나 신하들을 만나는 장소로 자주 사용하였다. 왕세자와 왕이 함께 강연(講筵)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현재 경현당은 사라졌으나 경희궁 전체를 그림으로 남긴 「서궐도안(西闕圖案)」을 통하여 그 위치와 건물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1744년(영조 20)에 그림으로 기록된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의 「경현당선온도(景賢堂宣醞圖)」를 통해서도 당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617년(광해군 9)에 건립된 경현당의 모습은 「서궐도안」의 모습과 조금 차이가 있다. 숙종대에 경현당을 수리하면서 숙종이 기록한 「경현당조굴소기(景賢堂竈窟小記)」를 통해 알 수 있다.
“경현당은 본래 세자가 경서를 강독했던 곳으로 경덕궁의 별당이며, 가장 넓고 환하다. 그래서 계복하려고 많은 신하가 모일 때는 반드시 여기서 모였다. 그러나 온돌이 한쪽 귀퉁이에 있고 내가 앉은 자리도 중앙에 있지 않기 때문에 보기에 불편했다. 호조(戶曹)에 명하여 온돌을 고치게 하고 내가 남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제 3개의 문을 열고 여러 신하를 맞이하니 정말로 보기에 좋았다. 세자가 강독할 때는 하나같이 법도에 따라 반드시 동쪽 벽에서 서쪽을 향하게 하였다.”
초기 경현당은 「경현당선온도」에서 묘사하듯 서쪽에 온돌이 있고 2칸이 마루로 구성되었으나, 숙종대에 국왕이 신하를 만날 때 자주 사용하게 되면서 동·서 온돌방을 갖추고 중앙에 대청을 둔 좌우대칭형의 평면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이 「서궐도안」에 묘사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왕과 왕세자의 활용이 잦았던 경현당은 고종대에 경희궁이 활용되지 못하면서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경희궁내신기전사궁분배도량안(慶熙宮內新起田四宮分排都量案)』은 1868년(고종 5)~1870년(고종 7)에 경희궁을 포함하여 4궁을 경작지로 분배한 기록이다. 이 기록에 경현당 주변을 경작지로 분배하였으며, ‘경현당기지(慶賢堂基址)’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미 건물은 사라진 후였다. 현재 경현당 위치에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형태
1744년에 그려진 「경현당선온도」와 「서궐도안」에서 묘사한 경현당의 모습을 보면, 5벌대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경현당선온도」에서는 지붕의 용마루에는 취두, 내림마루에는 용두를 올렸고, 추녀마루에 잡상이 5개씩 올려진 것으로 묘사된다.
경현당은 행각으로 둘러싸여 정사각형의 마당을 갖추었으며, 마당의 중심에는 연못이 있다. 경현당 북쪽은 양덕당(養德堂)과 연계하여 동궁의 주요 행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정조가 기록한 「경희궁지」에는 사방에 문이 있는데, 동문은 협화문(協和門), 그 동쪽에는 만상문(萬祥門), 서쪽에는 청화문(淸華門)과 통현문(通賢門), 남쪽에는 숭현문(崇賢門), 북쪽에는 숭덕문(崇德門)이다. 숙종이 경현당에서 석연을 베풀 때 숭덕문을 통해 경현당으로 나아갔다.
관련사건 및 일화
왕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숙종과 영조가 기로소에 들어가게 된 것을 기념하여 축하연을 행했는데, 두 번 모두 경현당에서 연회가 이루어졌다. 이 내용을 담은 그림을 통해 경현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719년(숙종 45)에 왕이 나이가 59세가 되어 신하들의 청으로 기로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경희궁 경현당에서 기로신하 10명을 불러 석연(錫宴)을 행하였다. 이는 『기사계첩(耆社契帖)』의 「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를 통하여 전해진다.
영조는 1744년에 59세를 맞이하여 기로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9월 10일에 기로신들에게 선온(宣醞)하며 친히 지은 칠언시에 대하여 여러 신하에게 화답의 글을 올리게 하고, 음병을 하사하였다. 이것 역시 그림으로 기록하여 『기사경회첩』의 「경현당선온도」에서 그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
- 『기사계첩(耆社契帖)』
- 『홍재전서(弘齋全書)』「경희궁지(慶熙宮志)」
- 신지혜, 「17~18세기 경희궁 동궁의 건축특성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은정태, 「고종시대의 경희궁-훼철과 활용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3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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