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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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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선인문 |
한글표제 | 선인문 |
한자표제 | 宣仁門 |
상위어 | 창경궁(昌慶宮) |
관련어 | 홍화문(弘化門)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연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선인문(宣仁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6년 8월 23일, 『광해군일기』 9년 1월 24일, 『철종실록』 8년 10월 15일, 『숙종실록』 27년 10월 10일 |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있는 문.
개설
선인문(宣仁門)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남쪽에 설치한 문이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는 홍화문 바른편에 있는 문을 선인문이라 하고 조정 신하들은 대개 이 문으로 출입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이 문의 옛 이름은 서린문(瑞獜門)인데, 뒤에 선인문으로 고쳤다.”고 했다.
내용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제1권 「경도(京都)」조에 “홍화문의 남쪽을 선인문이라 하는데, 옛날 이름은 서린문이며, 곧 동궁(東宮)의 정문으로 조정 신하들이 모두 여기로 출입하고, 대관은 반드시 정문을 경유한다.”고 했다. 특기할 만한 내용은 선인문이 세자궁의 정문이라는 것이다.
왕세자가 선인문을 통해 출궁 또는 환궁하는 모습은 성균관(成均館) 입학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등장한다. 『승정원일기』 1871년(순조 17) 2월 5일자 기록에 따르면, “왕세자가 입학할 때 1669년(현종 10)에는 선인문을 통해 출궁해서 돈화문(敦化門)으로 환궁했고, 1695년(숙종 21)과 1722년(경종 2), 1727년(영조 3)에는 집춘문(集春門)을 통해 출궁해서 선인문으로 환궁했으며, 1742년(영조 18)에는 출궁과 환궁을 모두 집춘문으로 했고, 1761년(영조 37)에는 출궁과 환궁 모두 홍화문을 통해 했다.”고 한다. 대부분 선인문을 통해 세자의 출입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761년(영조 37)의 출궁과 환궁에 대한 것은 내용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는 왕세자가 아닌 왕세손의 성균관 입학이 치러진 해였다. 『승정원일기』 1761년 1월 2일자 기록에 따르면 왕세자는 집춘문을 통해 출궁하고 선인문을 통해 환궁해야 하는데 선인문은 왕세자의 정문이기 때문에 왕세손은 선인문을 통해 환궁할 수 없고 협문(夾門)을 이용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 결과 왕세손은 모두 집춘문을 통해 출궁과 환궁을 했다. 이를 통해 선인문을 사용하는 데 엄격한 제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대에는 왕이 직접 선인문을 통해 출궁 또는 환궁한 사례가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었다. 이전 시기에 왕이 선인문을 이용한 사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로써 시대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880년(고종 17) 9월 4일에는 문묘에 작헌례를 진행하면서 선인문을 통해 출궁했고, 집춘문을 통해 환궁한 일이 있다. 또 1882년(고종 19)에는 종묘에 갈 때 건양문(建陽門), 동룡문(銅龍門)을 지나 선인문을 통해 출궁한 일이 기록되었다.
여러 기록에서 선인문이 원래 서린문이었다는 내용은 납득하기 어렵다. 서린문은 사료에서 대부분 흠경각(欽敬閣)과 관련한 내용으로 등장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5권 「천문전고(天文典故)」 의상(儀象)조에는 “흠경각은 1434년(세종 16)에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옆에 창건했는데 중간에 불이 나서 타 버리고, 1554년(명종 9)에 옛터에 재건했더니 또다시 병화를 만나고, 1614년(광해군 6)에 창덕궁 서린문 안에 다시 지었다. 1656년(효종 7)에 흠경각을 헐어 버리고 만수전(萬壽殿)을 지었다.”고 기록되었다. 같은 내용이 『궁궐지(宮闕志)』「만수전조」에도 수록되었다. 만수전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서쪽 편에 위치한 건물이다. 따라서 서린문은 선인문과 전혀 무관한 문의 명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선인문은 창경궁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등장하여 독특하다. 1475년(성종 6)에 궁궐의 문들 중에서 이름이 없는 것들을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서거정(徐居正)에게 이름을 짓도록 하였는데, 이들 문 중에서 선인문은 창덕궁 바깥 동쪽 담장문[外東墻門]으로 등장한다(『성종실록』 6년 8월 23일). 이때 창덕궁 동쪽에는 창경궁의 전신인 수강궁(壽康宮)이 있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때 이름 붙인 선인문이 후에 창경궁의 선인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또 1483년(성종 14)에 수강궁 터에 창경궁을 영건할 때 이미 선인문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으로 창경궁이 소실되면서 선인문도 같이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광해군 때 창경궁을 다시 지으면서 같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해군일기』에서 선인문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해는 1617년(광해군 9)인데, 선인문의 자물쇠가 저절로 열렸다는 보고가 기록되었다(『광해군일기』 9년 1월 24일).
1857년(철종 8)에는 선인문이 화재로 소실되었다(『철종실록』 8년 10월 15일). 밤 3경(三更)에 빈전도감(殯殿都監)의 가설건물에서 불이 일어나 선인문과 동북소(東北所), 부장청(部將廳), 위장소(衛將所), 주자소(鑄字所)의 대청(大廳)과 판당(板堂)을 합하여 62칸이 탔다. 당시는 순조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상중이었다. 화재로 소실된 선인문의 중건에 대한 내용은 고문헌에서 보이지 않지만, 이후 곧바로 중건한 것으로 여겨진다.
형태
「동궐도(東闕圖)」에 그려진 선인문은 2칸의 모습이다. 북쪽의 1칸은 솟을대문으로 남쪽 문보다 지붕 높이가 높고 문이 닫힌 모습이다. 한편 남쪽의 1칸은 지붕의 높이가 낮은 반면 문이 열린 모습이다. 선인문은 동궁의 정문이기 때문에 오직 세자만 이 문을 통해 출궁과 환궁을 할 수 있었다. 창경궁에 입직하는 많은 관원은 북쪽의 솟을대문이 아니라 남쪽의 소문을 이용해 궁에 드나들었다. 선인문은 북쪽으로 행각에 연접해 있고 남쪽으로 궁장과 잇닿아 있는 모습이다.
오늘날의 선인문은 「동궐도」에 묘사된 모습과 형태가 많이 다르다. 문이 2칸으로 구성된 것은 같지만 「동궐도」에서는 북쪽 1칸을 솟을대문, 남쪽 1칸을 평대문으로 묘사해 마치 2개의 문이 붙어 있는 것으로 표현한 반면, 오늘날의 선인문은 지붕 높이를 모두 같게 하여 하나의 문인 것처럼 만들었다. 다만 통과하는 문의 높이에서는 북쪽 칸을 높게 만들어 차이를 두었다. 또 「동궐도」에서는 선인문 북쪽으로 행각이 연접해 있는 반면, 오늘날에는 궁궐 담장이 연접해 있다. 1857년(철종 8)에 화재로 선인문이 소실된 이후 중건하는 과정에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관련사건 및 일화
궁궐에서 내쫓기듯이 궁성 밖으로 내쳐지는 경우에 유독 선인문을 통과하는 경우가 많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燕山朝)」 고사본말에 따르면,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은 선인문을 통해 궁 밖으로 쫓겨나 강화로 귀향을 가게 됐다. 또 『연려실기술』 제27권 「인조조(仁祖朝)」 고사본말에 의하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부인인 세자빈 강씨[姜嬪] 역시 폐위되어 선인문을 통해 옛집으로 쫓겨났다.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禧嬪張氏)는 창경궁 취선당(就善堂)에서 자결했다. 『숙종실록』에는 그녀의 시신이 어느 문을 통해 출궁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수록되었다(『숙종실록』 27년 10월 10일). 장희빈(張禧嬪)의 시신은 건양현(建陽峴)을 통해 단봉문(丹鳳門)으로 나가야 하지만, 숙종은 이것이 못마땅했다. 궁궐에서 빈 또는 공주와 같은 여성들의 시신은 단봉문을 통과해 출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건양현은 창덕궁 협양문(協陽門)이 위치한 곳으로 창덕궁의 차비문이 있는 곳이다. 숙종은 자신이 있는 곳 바로 정면으로 장씨의 시신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장씨의 상여는 선인문을 통과해 나갔다. 2칸의 선인문에서도 남쪽의 소문(小門)을 통해 출궁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志)』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경지략(漢京識略)』「동궐도(東闕圖)」
- 그림1_00017951_「동궐도」, 선인문 부근,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