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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5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함경북도 종성부에 속한 첨절제사진.

개설

동관진은 함경도 육진(六鎭) 가운데 하나인 종성의 주요 거진(巨鎭)이다. 이 지역은 고려시대에는 여진족의 거주지였으나 세종대에 육진을 개척하면서 두만강 변의 최북단 가운데 한 곳으로 영토로 확보되었다. 세종대에는 동관에 보(堡)를 설치하였는데, 세조대에 여진과의 공방(攻防)이 계속되면서 돌로 성을 쌓고 진(鎭)으로 승격하였다. 동관진의 행정 구역은 종성부의 동관사(潼關社)였는데, 1896년 이곳을 동관면(潼關面)으로 개편하면서 진을 폐하였다. 이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종성군 종관면으로 다시 개편되었다.

위치 및 용도

동관진은 종성부의 북쪽 18리(약 7.1㎞)에 위치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종성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보청포봉수(甫靑浦烽燧), 북봉봉수(北峰烽燧)가 있어 좌우측으로 소식을 주고받는데 두만강에 인접한다. 동북쪽으로는 온성부(穩城府), 서쪽으로는 회령부(會寧府)와 연결되어 여진족을 방어한다. 동관진은 세종대 이후로 두만강 일대에서 건너오는 여진족의 감시와 방어를 담당했고, 종성과의 사이에는 병마절도사가 겨울철에 머무는 행영(行營)이 있었다.

변천 및 현황

동관진은 본래 동관보(潼關堡)였다. 본래 ‘동관’이라는 말은 ‘동건(童巾)’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다. 조선 건국 초 육진을 개척하기 이전, 회령이나 종성·온성·경원·경흥 등은 모두 여진인들의 거주지로 ‘동건’도 이 가운데 한 지역이었다. ‘동건’은 ‘중컨(jungken)’의 음차인데, 이는 만주어로 종(鐘)을 의미한다. 이 지역에 있던 동건산(童巾山)이라는 지명은 종을 뒤집어놓은 것과 같은 형상이라는 데에서 나왔다.

1435년(세종 17) 조선은 회령으로부터 이 지역을 독립시켜 종성군(鍾城郡)을 설치하고 첨절제사(僉節制使)로 하여금 지군사(知郡事)를 겸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7년 7월 19일). 이때 ‘종(鐘)’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것은 이로부터 유래한다. 그리고 1441년(세종 23) 세종은 도체찰사황보인(皇甫仁)으로 하여금 종성을 수주(愁州)의 두만강 변으로 옮기게 하고 동관보(童關堡) 등 다섯 개의 보(堡)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세종실록』 23년 1월 29일). 이때 동관은 ‘동관(潼關)’ 혹은 ‘동관(童關)’으로 불렸는데, 이는 동건(童巾)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동건산 위에는 ‘동건산성(童巾山城)’이 있었는데, 이는 동관진과는 다른 성이다.

동관보의 성은 1459년(세조 5)에 이르러서야 석성(石城)이 축조되었다(『세조실록』 5년 4월 27일). 그리고 이듬해에는 동관진이 여진 올량합(兀良哈)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조선에서도 대규모의 병력을 출동시켜 여진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동관진은 여진과의 주요 충돌지점이 되면서 그 전략적 중요성이 고조되었다. 이로 인해 1464년(세조 10)에는 동관보를 진(鎭)으로 올리고 첨절제사를 두었다(『세조실록』 10년 7월 10일).

세조대에는 동관진에 여진과의 긴장 관계가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백성의 수도 많아 중요한 진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다음 왕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1479년(성종 10) 3월, 성종은 동관진의 첨절제사를 반드시 당상관으로 보낼 것을 병조에 지시하였다(『성종실록』 10년 3월 21일). 이는 늘 지켜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1506년(중종 1) 10월에 고령과 동관진은 북방의 거진으로 조종조부터 당상관을 차출하여 파견하였다는 언급이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중종실록』 1년 10월 2일) 대체로 동관진의 첨절제사는 정3품의 당상 무관인 절충장군을 파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관진은 중종대와 선조대에도 여진족의 공격에 자주 노출되었다. 특히 1603년(선조 36) 이후부터는 홀라온(忽剌溫)의 공격에 직면하여 1605년(선조 38) 3월에는 마침내 함락되어 첨절제사가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선조실록』 38년 3월 22일). 이 일로 동관진은 사실상 완전히 무너졌다. 그러나 홀라온의 공격 위협이 계속되었으므로 후임 첨사로 원열(元悅)을 보내어 성을 재건하게 하였다.

동관진은 이후에도 종성부의 속진으로 기능했고, 1883년(고종 20)에는 방원보(防垣堡)를 이속하여 합치기도 했다. 동관진은 1896년(고종 33) 동관사를 동관면(潼關面)으로 개편하면서 폐지되었다.

현재 동관진은 북한의 행정 지역 개편을 통해서 온성군(穩城郡) 강안리에 속한다. 지금까지도 성의 서북 모서리 부분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474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동관진은 정3품의 병마첨절제사의 영(營)이다. 성은 석축으로 둘레는 2,982척(약 0.9㎞)이고 높이는 9척(약 2m)에 이른다. 행정 구역으로는 동관사에 해당하여 336호(戶)가 있었으며, 성안에는 동관창(潼關倉)이라는 창고가 있어 곡식을 비축하였다. 또 동관발소(潼關撥所)가 있어 발장(撥將) 한 명과 발군(撥軍) 다섯 명을 두었다. 장성문봉수(長城門烽燧), 보청포봉수, 북봉봉수 등을 관리했다. 현재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서북쪽의 성벽은 실측 높이가 4m 정도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동관진은 1605년(선조 38)에 홀라온 여진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시 여진족의 침략은 매우 잦았고, 이따금 변방 장수들이 희생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적의 공격에 의해 진성(鎭城)이 함락되고 첨절제사까지 전사한 사례는 흔치 않았다. 조선은 이에 대한 반격을 가했으나 건퇴(建退)라는 장소에서 홀라온 군대에게 참패하였고, 이후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00장의 직첩(職帖)을 주고 화의를 맺었다. 이후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성곽 제도를 급히 받아들여 육진 일대의 성곽을 개축하게 된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만기요람(萬機要覽)』
  • 『관곡문집(寬谷文集)』북관기(北關記)
  • 『북로기략(北路紀略)』
  • 장정수, 「선조대 대여진 방어전략의 변화 과정과 의미」, 『조선시대사학보』67, 조선시대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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