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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흥정당의 동쪽 행각에 있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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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수정전의 외행각에 있던 문.
  
 
=='''개설'''==
 
=='''개설'''==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경희궁의 흥정당(興政堂)은 선대 왕들이 정사를 보던 전각으로 편전 건물이었다. 숭양문은 흥정당의 동쪽 행각에 있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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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수정전은 1867년(고종 4)에 옛 집현전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전각이다. 고종대에 간행된 『은대조례』에 따르면 수정전은 편전으로도 쓰였다. 숭양문(崇陽門)은 이 수정전의 외행각에 있던 문이다.
  
 
=='''위치 및 용도'''==
 
=='''위치 및 용도'''==
  
숭양문은 흥정당의 동쪽 행각에 있는 문이다. 남쪽 행각에는 흥정당의 정문인 흥정문(興政門)이 있었고, 서쪽 행각에는 광명문(光明門)·금요문(金曜門) 등이 있었다. 경복궁에도 같은 이름의 문이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411008_001 『고종실록』 4년 11월 8일]). 경희궁과 경복궁의 숭양문은 모두 편전에 속한 문이다. 왕은 남쪽을 바라본다, 즉 ‘남면’한다는 상징과 ‘숭양(崇陽)’이 서로 통하는 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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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숭양문은 삼문으로 조성된 규모가 장대한 문으로 수정전 영역의 정문 역할을 하였다. 수정전은 경복궁의 남서쪽에 비교적 큰 영역을 차지하였는데 그 주변에는 옥당, 내각, 정원, 내반원, 대전장방, 빈청, 약방, 의약청, 선전관청, 검서청, 장무관직소 등의 궐내 각사가 들어차 있었다. 수정전은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며 전각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전각이었다. 궁궐 내 여타의 건물과 달리 전면에 3개의 마당을 3중의 행각이 둘러싸는데 외행각, 중행각, 수정전을 직접 두른 내행각으로 이루어졌다. 숭양문은 그중 가장 바깥 영역인 외행각의 문인데, 외동행각에 연명문(延明門)이 있고, 중행각에 영화문(永化門)이 있고, 그 북쪽에 수정전 내행각에 수정문이 축선 상에 차례로 놓였다. 숭양문은 수정전 영역의 가장 전면에 삼문을 갖추고 서서 위용을 자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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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에도 같은 이름의 문이 있었다. 경복궁과 경희궁의 숭양문은 모두 편전에 속하였다. 왕은 남쪽을 바라본다, 즉 ‘남면’한다는 상징과 ‘숭양(崇陽)’이 서로 통하는 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변천 및 현황'''==
 
=='''변천 및 현황'''==
  
숭양문은 1620년(광해군 12) 경희궁 창건 당시에 조성되었으나, 1829년(순조 29)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1831년(순조 31)에 복원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도성 안의 모든 궁궐이 어처구니없이 훼손되었으나 가장 처절하게 훼손이 일어난 것이 경희궁이었다. 흥정당이 광운사(光運寺)의 전각으로 팔려 나간 1928년 이전에 숭양문은 이미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복원되지 못하고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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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숭양문은 1867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함께 조성하였으나, 1895년(고종 32)에 수정전이 군국기무처로 변하면서 중행각과 외행각에 변화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수정전 행각의 영역이 모두 훼철되었으나 아직 복원되지 못하였다.
  
 
=='''형태'''==
 
=='''형태'''==
  
경희궁의 숭양문은 흥정당의 동행각 북쪽 가장 끝에 놓였다. 「서궐도안(西闕圖案)」의 도판이 명확하지 않은데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이고 솟을문에 맞배지붕을 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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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숭양문은 수정전 외행각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솟을삼문으로 들어서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관련사건 및 일화'''==
  
『일성록』의 1765년(영조 41) 8월 28일 기사에 숭양문이 언급되었다. 영조가 탄신일을 보름가량 앞두고 왕세손을 대동하고 조정의 원로들이 모여 있는 기로소(耆老所)의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갔다. 기로·대신 등 신하들을 입시하라 명하고 작은 연회를 베풀어 음식을 내리며 왕 자신도 술잔을 받았다. 연회에 참석한 신하들이 앞으로 있을 탄신진하를 받으시라며 연이어 술을 청하니 곤혹스럽다며 마다했다. 환궁 길에 육상궁에 들렀고, 궁궐로 돌아와 흥정당 동문인 숭양문 밖에 이르렀을 때, 지금 자신의 나이 72세는 태조와 공자보다 1살이 적은 때로 추모하는 마음이 여느 때보다 배나 크고, 그러한 마음으로 세손이 보필한 기로소에서 나이든 군신이 모여 밥을 나누었으니 특별한 일이라 하며, 이 일을 후세에 전하고 싶다는 하교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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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고종 13) 6월 12일에 일본의 이사관인 외무대승미야모토 쇼이치가 왕을 접견하려고 경복궁에 들어오자 왕이 숭양문 밖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1306012_001 『고종실록』 13년 6월 12일]).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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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日省錄)』       
 
*『일성록(日省錄)』       
 
*『궁궐지(宮闕志)』       
 
*『궁궐지(宮闕志)』       
*『은대조례(銀臺條例)』「서궐도안(西闕圖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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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대조례(銀臺條例)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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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5 판



경복궁 수정전의 외행각에 있던 문.

개설

경복궁의 수정전은 1867년(고종 4)에 옛 집현전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전각이다. 고종대에 간행된 『은대조례』에 따르면 수정전은 편전으로도 쓰였다. 숭양문(崇陽門)은 이 수정전의 외행각에 있던 문이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의 숭양문은 삼문으로 조성된 규모가 장대한 문으로 수정전 영역의 정문 역할을 하였다. 수정전은 경복궁의 남서쪽에 비교적 큰 영역을 차지하였는데 그 주변에는 옥당, 내각, 정원, 내반원, 대전장방, 빈청, 약방, 의약청, 선전관청, 검서청, 장무관직소 등의 궐내 각사가 들어차 있었다. 수정전은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며 전각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전각이었다. 궁궐 내 여타의 건물과 달리 전면에 3개의 마당을 3중의 행각이 둘러싸는데 외행각, 중행각, 수정전을 직접 두른 내행각으로 이루어졌다. 숭양문은 그중 가장 바깥 영역인 외행각의 문인데, 외동행각에 연명문(延明門)이 있고, 중행각에 영화문(永化門)이 있고, 그 북쪽에 수정전 내행각에 수정문이 축선 상에 차례로 놓였다. 숭양문은 수정전 영역의 가장 전면에 삼문을 갖추고 서서 위용을 자랑하였다.

경희궁에도 같은 이름의 문이 있었다. 경복궁과 경희궁의 숭양문은 모두 편전에 속하였다. 왕은 남쪽을 바라본다, 즉 ‘남면’한다는 상징과 ‘숭양(崇陽)’이 서로 통하는 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의 숭양문은 1867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함께 조성하였으나, 1895년(고종 32)에 수정전이 군국기무처로 변하면서 중행각과 외행각에 변화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수정전 행각의 영역이 모두 훼철되었으나 아직 복원되지 못하였다.

형태

경복궁의 숭양문은 수정전 외행각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솟을삼문으로 들어서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76년(고종 13) 6월 12일에 일본의 이사관인 외무대승미야모토 쇼이치가 왕을 접견하려고 경복궁에 들어오자 왕이 숭양문 밖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고종실록』 13년 6월 12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은대조례(銀臺條例)』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