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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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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약산성 |
한글표제 | 약산성 |
한자표제 | 藥山城 |
상위어 | 영변읍성(寧邊邑城), 철옹산성(鐵甕山城) |
관련어 | 관방(關防), 금성탕지(金城湯池), 철옹성(鐵甕城)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삼국~조선 |
왕대 | 삼국~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장소 | 평안도 영변대도호부(현 평안북도 영변군) |
규모(정면/측면/칸수) | 둘레 1㎞ |
양식 | 산정식 산성 |
관련 인물 | 황희(黃喜), 이광한(李光漢)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약산성(藥山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4년 8월 15일, 『세종실록』 10년 11월 19일, 『성종실록』 25년 2월 30일 |
평안도 영변의 읍성인 철옹성의 서쪽에 있는 약산의 둘레에 쌓은 산성.
개설
약산성은 의주에서 서울을 잇는 의주대로(義州大路)의 중요한 방어거점 중 하나인 영변읍성(寧邊邑城) 즉 철옹성(鐵甕城)의 일부로 세워진 성이다. 기록에 따라서는 영변읍성 그 자체를 약산성으로 부르는 경우도 보인다. 본래 고구려 때 세워진 것으로 생각되지만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계속하여 개축되었다. 영변의 위치상 평안도와 서울이 통하는 길의 한복판에 있어 일찍부터 중시되었는데, 세종대 이곳에 영변의 읍치(邑治)를 설치하고 절제사영(節制使營)을 세웠으며 토관(土官)을 설치하며 이민을 장려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숙종대부터 약산성에 외성을 설치하고 더 나아가 영변읍성인 철옹성을 지어 방어기능을 더욱 강화하였다.
위치 및 용도
영변은 의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의주대로의 복판에 위치한다. 고려시대에 영변은 무주(撫州)·무산(撫山)으로 불렸는데 1429년(세종 11) 연산(延山)과 합쳐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로 삼고, 읍(邑)을 무산의 약산성에 옮기고 진변위(鎭邊衛)의 3영(領)을 두었다. 각 영에 사직(司直) 1인, 부사직(副司直) 2인, 사정(司正) 3인, 부사정(副司正) 3인, 대장(隊長) 10인, 대부(隊副) 20인을 두었다[『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영변대도호부]. 1455년(세조 1)에 진관체제를 정비할 때 영변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지금의 평안북도 남쪽에 해당하는 청천강 이북의 가산(嘉山)·희천(熙川)·운산(雲山)·태천(泰川)·박천(博川) 등의 고을을 나누어 소속시켰다. 이후 영변의 부사(府使)가 절제사(節制使)를 겸하고 약산성에 거주하면서 평안도 일대를 수비하였다.
약산(藥山)은 영변읍 서쪽에 있는 산이다. 산의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지만 그 정상은 평평하여 일찍부터 성을 쌓고 그 안에 성가퀴를 설치하여 영변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약산 주변에는 성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더 높은 산도 없어서 일찍부터 끓는 못에 둘러싸인 무쇠 성과 같다 하여 금성탕지(金城湯池)라는 평가를 받았다. 때문에 조선후기에는 이곳에 개천(价川)과 운산(雲山)의 군량미를 보관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약산성은 고구려 때 처음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록에는 오랫동안 보이지 않다가 조선에 들어와 태종에 의해서 새로 수축되었다. 이때의 축성은 부근 주군의 군량을 들여와서 보관하려는 목적에서였다(『태종실록』 14년 8월 15일). 그 후 세종대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황희(黃喜)에 의해 절제사영(節制司營) 설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세종실록』 10년 11월 19일), 그 이듬해부터 영변대도호부가 설치되어 그 읍치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442년(세종 24) 절제사영을 파하였다가, 1446년(세종 28)에 회복시켰고, 1450년(세종 32)에 다시 파한 것을 단종대에 회복시켜 절제사에게 부사(府使)를 겸하게 하였다. 성종은 이곳에 병영을 설치하게 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25년 2월 30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영변의 군사적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어, 인조대에는 유림(柳琳)에 의해 약산성이 수축되고 영변부사는 청남방어사(淸南防禦使)를 겸하였다. 숙종대 초반에는 청(淸)이 중원(中原)에서 패퇴하여 본거지인 영고탑(寧古塔)으로 돌아간다는 영고탑회귀설(寧古塔回歸說)이 확산되면서 각지의 산성들을 수축하였는데, 약산성 역시 그 과정에서 개축·증축되었다. 1676년(숙종 2) 약산성의 외성을 쌓아 협소하고 우물과 샘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는데 비변사의 반대로 중단되었으나 1683년(숙종 9) 영변부사(寧邊府使)이광한(李光漢)에 의해 약산성에 덧대는 신성(新城)과 북성(北城)이 증축되었다. 1725년(영조 1)에도 약산성을 개축하였으며, 1853년(철종 4)에는 별장(別將)을 두고 절목(節目)을 만들어 성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형태
약산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정상은 평평하다. 둘레는 약 1㎞이다. 동·서·북면은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삼아 별다른 석축을 설치하지 않았고, 남면 일부에만 성벽을 쌓았다. 약산성 동남쪽에는 홍예문(紅霓門)을 두고 문루를 쌓아 본성과 통하는 큰 통로를 만들었다. 성안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성벽의 돌은 자연석을 사각추 형대로 다듬은 돌로 정연하게 쌓았으며 성벽 윗부분에는 성가퀴를 두르고 사격을 할 수 있는 구멍인 총안(銃眼)을 만들어 수성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군국총목(軍國總目)』
- 『만기요람(萬機要覽)』
- 조선유물유적도감편찬위원회, 『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1,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 나경준, 「조선 숙종대 관방시설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 박세연, 「17세기~18세기 전반 승군의 확대와 조발방식의 변화」,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 황부연, 「조선후기 산성 수축과 운영의 재정구조」,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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