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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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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청연루 |
한글표제 | 청연루 |
한자표제 | 淸讌樓 |
상위어 | 경복궁(景福宮) |
관련어 | 교태전(交泰殿), 자경전(慈慶殿)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조재모 |
장소 | 경복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청연루(淸讌樓)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31년 6월 18일, 『단종실록』 2년 6월 6일, 『인종실록』 1년 7월 1일, 『세종실록』 31년 6월 18일, 『명종실록』 12년 5월 11일, 『고종실록』 4년 8월 18일, 『고종실록』 10년 12월 10일, 『고종실록』 12년 6월 3일, 『고종실록』 13년 4월 1일, 『고종실록』 13년 11월 4일, 『고종실록』 25년 4월 25일, 『고종실록』 25년 5월 19일, 『중종실록』 31년 6월 11일, 『인종실록』 1년 6월 26일, 『인종실록』 1년 7월 1일 |
조선전기에 경복궁 교태전 동쪽에 있었던 누각, 또는 고종대 지은 자경전의 누마루.
개설
자경전(慈慶殿)은 세종이 건립한 내전의 누각이다. 교태전(交泰殿)의 동쪽에 위치하였으며, 인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는 원래의 청연루(淸讌樓)를 복구하지 않고 자경전의 일부로 조성하였다.
위치 및 용도
세종대에 건립된 청연루는 『궁궐지(宮闕志)』에 교태전의 동쪽에 있었다고만 기록되었다. 「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 「경복궁도(景福宮圖)」 등의 도판 사료에는 교태전의 동쪽 영역에 자미당(紫薇堂)과 나란히 묘사되었으며 누각의 모습이다. 이후 고종대에 중건된 경복궁에서는 자미당 동쪽의 자경전의 누마루로 건립되었다.
세종은 강녕전(康寧殿)·만춘전(萬春殿)·천추전(千秋殿)·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사정전(思政殿) 등에 대해 정궁(正宮)으로, 함원전(含元殿)·교태전·자미당·종회당(宗會堂)·송백당(松栢堂)·인지당(麟趾堂)·청연루 등은 정궁이 아닌 것으로 정의하면서 분명히 구분하였다(『세종실록』 31년 6월 18일). 즉 청연루는 내별전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454년(단종 2)에 세조가 영해군(寧海君), 임영대군(臨瀛大君) 등 여러 종친과 경회루 아래에서 풍정(豊呈)을 드렸는데, 이날 중궁(中宮)은 청연루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어 왕대비인 세조 비 윤씨(尹氏), 2명의 숙의(淑儀), 각 대군(大君)과 군(君)의 부인들이 참석하였다(『단종실록』 2년 6월 6일). 이로 보아 경회루(慶會樓)와 청연루는 각각 외연(外宴)과 내연(內宴)의 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인종은 이곳 소침에서 승하하였다(『인종실록』 1년 7월 1일).
변천 및 현황
조선전기의 청연루는 세종대에 건립되었다(『세종실록』 31년 6월 18일). 이후 1557년(명종 12)에 청연루 근처에 눈비를 피할 수 있는 월랑을 짓고자 하였던 바 있다(『명종실록』 12년 5월 11일).
고종대에 중건된 경복궁에서는 원래 청연루의 모습을 복구하지 않고 대신 자경전의 누각을 청연루로 이름 하였다. 자경전의 북상실은 순희당(純熙堂), 서소침은 석지당(錫祉堂), 중소침은 덕필당(德必堂) 등으로 하였다. 문의 이름을 정하면서 청연루 서판장문은 건경문(建慶門), 장복문(章福門)으로 이름하였다(『고종실록』 4년 8월 18일).
조선전기의 청연루와 고종대에 중건한 경복궁의 청연루는 다른 형태이다. 1873년(고종 10) 자경전에 화재가 발생하였고(『고종실록』 10년 12월 10일), 이듬해 5월에 복원 논의가 있었다. 1875년(고종 12)과 1876년(고종 13)의 기록에 교태전, 자경전, 자미당, 인지당을 재건할 때 제술관에게 시상한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중건 공사가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종실록』 12년 6월 3일), (『고종실록』 13년 4월 1일). 그러나 1876년 11월에 다시 경복궁에 화재가 있었다. 이때 교태전, 인지당, 건순각(健順閣), 자미당, 덕선당(德善堂), 자경전, 협경당(協慶堂), 복안당(福安堂), 순희당(純熙堂), 연생전, 경성전, 함원전, 흠경각(欽敬閣), 홍월각(虹月閣), 강녕전 등 830여 칸이 소실되면서 함께 사라졌다(『고종실록』 13년 11월 4일).
이때의 화재로 인한 소실은 1888년(고종 25)에 이르러 복구되었다. 자경전은 함원전·경성전·연생전·흠경각과 함께 1888년 4월 26일에 정초하였으며(『고종실록』 25년 4월 25일), 상량문제술관(上樑文製述官)에 김병덕(金炳德), 서사관에 조강하(趙康夏), 현판서사관(懸板書寫官)에 성이호(成彛鎬)를 제수하였다(『고종실록』 25년 5월 19일). 지금의 자경전과 청연루는 이때 조성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자경전은 현재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경복궁고도」, 「경복궁도」 등 조선전기의 경복궁을 묘사한 도판에는 정면 2칸 정도의 누각집으로 묘사되었다. 이들 도판의 성격상 건축물의 형태를 추정할 만큼의 정보는 없다. 고종대의 경복궁을 묘사한 「북궐도형(北闕圖形)」에는 자경전이 정면 10칸의 전후퇴집으로 묘사되었다. 동쪽으로는 정면 6칸의 협경당이 전퇴집으로 연이어 있고, 서북쪽으로는 복안당이 정면 5칸 반, 측면 2칸으로 연결되었다. 자경전 동온실 남쪽으로는 2칸의 청연루가 연결되었다. 청연루의 2칸에는 모두 ‘루(樓)’라고 표기되었으며, 북쪽으로도 모두 같은 표기가 있어 청연루 부분을 경계로 자경전과 협경당이 분리되었다.
현재의 청연루는 자경전 본채의 동남쪽 끝에서 내루 형식으로 전면 2칸 규모가 돌출되었다. 각 칸의 길이는 3,063㎜, 즉 10척이다. 내부에는 우물마루가 깔렸고 아래에 장초석이 설치되어 누의 하부가 비어 있다. 누의 상부에는 각 칸에 머름을 설치하고 4분합 띠살창이 설치되었다. 지붕에는 팔작 형식으로 내밀었고 지붕마루에는 회를 바르는 양상도회, 즉 양성바름을 하였다. 취두·용두·잡상·토수를 사용하여 장식하였는데, 자경전 본채와 같은 양식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중종대에 청연루 아래 내탕의 물건에 불이 붙는 일이 있었다. 불길을 발견하고 사람을 불러 모아 불을 끈 나인[內人] 전씨(全氏)를 상궁(尙宮)으로 격상하였다(『중종실록』 31년 6월 11일). 인종은 병이 위중하여 청연루로 이어하였다가(『인종실록』 1년 6월 26일) 청연루 아래 소침(小寢)에서 훙서하였다(『인종실록』 1년 7월 1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경복궁도(景福宮圖)」「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경복궁 자경전 및 자경전 십장생굴뚝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0.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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