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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삼수군에 설치하여 권관이 지휘하던 군사시설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 초기부터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소농보가 소속돼 있는 삼수군(三水郡)은 조선 초기 본래 갑산군(甲山郡)의 삼수보였는데, 만호를 두어 방어를 담당하게 하고 있었다. 1446년(세종 28) 삼수보가 적의 침입 경로에 요해처가 된다고 하여 군을 설치하고 함흥부(咸興府)의 관할로 삼았다. 지군사(知郡事) 1인이 배속되어 함흥도우익병마(咸興道右翼兵馬)를 겸하였다. 삼수군의 요해처는 크게 두 곳이 있었는데, 바로 삼수동구(三水洞口)와 나난보(羅暖堡)였다. 소농보는 나난보에서 불과 20리(약 8㎞)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설치되어 군사적 중요성이 높은 진보였다.

위치 및 용도

삼수군 중심에서 동쪽으로 22리(약 8.6㎞) 떨어진 압록강 변에 위치하였다. 앞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뒤로는 소농산(小農山)이 서 있었다. 소농보의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따라 갈파지(乫波知)·구갈파지(舊乫坡知)·후주(厚州) 등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나난보·인차외(仁遮外)를 거쳐 백두산 천지로 이어졌다. 소농보는 좁은 강폭을 두고 바로 이민족과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소농보와 같은 진보는 기본적으로 함경도 최전방과 내지의 요충지에서 실질적인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시설이었다. 진보는 적 침입 시 일차적인 방어처이면서 각지에 있는 봉수와 파수를 관리하였다.

변천 및 현황

1493년(성종 24) 기록에 처음 보인다. 영안도(현 함경도) 연변(沿邊)에 사는 백성은 겨울철에는 거진(巨鎭)에 보인으로 들어가는데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모두 소농보에 그대로 살기를 원한다는 내용이다(『성종실록』 24년 4월 13일). 즉, 소농보가 작은 진보이기 때문에 겨울철에는 지키지 않고 인근에 큰 진으로 옮겨 방어태세를 구축했던 것이다. 조선후기에도 계속해서 권관(權管)이 관할하는 진보로 운영되었다.

형태

1500년(연산군 6)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640척(약 194m)이며 높이가 8척(약 2.4m)이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97년(선조 30)에 소농보 인근에서는 화산 폭발과 지진이 일어났다. 『선조실록』에는, “지난 8월 26일 진시에 삼수군 지방에 지진이 일어나 잠시 후에 그쳤고, 27일 미시에 또 지진이 일어나 성의 두 군데가 무너지고 고을 건너편에 있는 시루바위[甑巖]의 반쪽이 무너졌으며, 그 바위 아래 삼수동 중천(中川)의 물빛이 흰색으로 변했다가 28일에는 다시 황색으로 변했고, 인차외보(仁遮外堡) 동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붉은빛의 흙탕물이 솟아오르다가 며칠 만에 그쳤으며, 8월 26일 진시에 소농보 건너편 북쪽에 있는 덕자이천절벽(德者耳遷絶壁)의 사람이 발을 붙일 수 없는 곳에서 두 차례나 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크기가 몇 아름씩 되는 바위가 연기를 따라 터져 나와 종적도 없이 큰 산을 넘어갔습니다. 27일 유시에는 지진이 일어나 그 절벽이 다시 무너졌고, 그날 해시와 자시에도 지진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선조실록』 30년 10월 2일).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