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산성(白馬山城)"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9일 (토) 22:5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백마산성 |
한글표제 | 백마산성 |
한자표제 | 白馬山城 |
관련어 | 병자호란(丙子胡亂), 홍경래(洪景來)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노영구 |
장소 | 의주(義州) |
관련 인물 | 임경업(林慶業), 강감찬(姜邯贊)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백마산성(白馬山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6년 1월 21일, 『인조실록』 11년 6월 21일, 『순조실록』 14년 6월 20일, 『효종실록』 6년 1월 3일, 『영조실록』 29년 2월 21일, 『효종실록』 2년 2월 18일 |
평안북도 의주(義州)에 있는 산성으로 병자호란 당시 임경업이 청군의 침공에 대비하던 곳.
개설
고려전기 현종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강감찬에 의해 최초로 축조된 백마산성은 그 뒤 한동안 관리되지 못하고 버려져 있었다. 이후 백마산성은 정묘호란을 계기로 그 군사적인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의주부윤엄황(嚴愰)이 1628년(인조 6) 1월 새로이 개축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곧바로 개축되지는 않았다(『인조실록』 6년 1월 21일). 1633년(인조 11) 6월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이 청천강 이북 지역의 방어 강화를 위해 백마산성의 개축을 건의한 이후 개축에 착수하였다(『인조실록』 11년 6월 21일). 병자호란 당시 의주부윤임경업이 백마산성에 들어가 청군의 남하를 견제하였고 이후에도 평안도 지역의 방어에 있어서도 백마산성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이었다. 1753년(영조 29) 의주부윤남태기(南泰耆)가 외성(外城)을 돌로 축조하였다. 백마산성에는 조선후기에 방어군으로서 기패관(旗牌官) 180인, 보성생(補城生) 440인을 두었다. 19세기 초 평안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내란이었던 홍경래(洪景來)의 난 당시에도 백마산성은 반란군의 의주 공략을 저지한 군사적 요충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순조실록』 14년 6월 20일).
위치 및 용도
백마산성은 의주 남쪽 30리(약 11.8㎞)에 위치하고 있는 백마산(白馬山)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는 넓은 평야가 있으며 황해와 가까운 곳에는 넓은 갈대밭도 펼쳐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의주에서 출발하는 의주대로를 통제할 수 있으며 서해상을 통한 교통이 편리한 군사적 요충이었다.
변천 및 현황
고려전기 축조된 백마산성은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압록강 하류 지역의 군사적 긴장감이 줄어들면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였다. 한동안 버려져 있던 백마산성은 17세기 초 후금의 위협이 압록강 하류 지역까지 미치게 되자 이 지역 방어를 위해 축조 논의가 나타났다. 정묘호란 직후인 1628년 의주부윤엄황이 그 축조를 건의하였으나 곧바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 청천강 이북 지역의 방어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도원수김자점의 건의로 1633년 본격적으로 개축되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사전 계획에 따라 청북방어사임경업의 방어거점 역할을 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맺어진 정축화약(丁丑和約)으로 서북 지역의 성곽 보수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백마산성도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포루(砲樓)와 창고 등이 무너져 군사적 거점으로서 역할을 하기 어려웠으므로 1655년(효종 6) 초부터 효종의 명에 따라 무너진 백마산성의 시설을 승려를 동원하여 비밀리에 보수하였다(『효종실록』 6년 1월 3일). 백마산성은 1753년(영조 29) 의주부윤남태기가 돌로 내성의 동, 서, 북 3면에 걸쳐 외성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높였다(『영조실록』 29년 2월 21일).
형태
백마산성은 영조대 외성이 구축되면서 내성과 외성을 갖춘 이중성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내성의 규모는 둘레가 2,600보(약 4.7㎞), 성의 높이는 2장(약 6m)에 달하였고 옹성(甕城) 7곳, 치각(雉閣) 7개소, 성문 5개소가 있었고 성 내부에는 우물 32곳, 연못 13개소 등이 있었다. 아울러 동창(東倉)과 읍창(邑倉) 등의 군량 창고와 무기창고인 양무고(養武庫)와 결승정(決勝亭) 등이 있었다. 외성은 돌로 축성되었는데 내성의 동, 서, 북 3면에 붙여 낮고 평평한 형태로 축조되었다. 그 둘레는 2,103보(약 3.8㎞), 높이 2장, 치각 4개소, 장수들이 올라서 지휘하는 장대(將臺) 1개소, 순라군의 처소인 군포(軍鋪) 10개소, 그리고 우물이 3군데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효종 즉위 초인 1650년(효종 1) 3월 효종이 추진한 북벌(北伐) 계획이 김자점의 밀고로 청에 알려졌다. 이에 대한 조사를 맡아 청의 사문사신(査問使臣)으로 온 정명수(鄭命壽) 등의 압박으로 영의정이경석(李景奭)과 예조 판서조경(趙絅)이 그 책임을 지고 의주 백마산성으로 귀양을 갔다. 이후 청의 사면으로 이듬해 2월 영의정이경석 등이 한성으로 귀환하였다(『효종실록』 2년 2월 18일).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풍천유향(風泉遺響)』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석화,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압록강변의 방어체계」, 『한국문화』3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노영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내지 거점방어체계」, 『한국문화』3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