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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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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안정보 |
한글표제 | 안정보 |
한자표제 | 安定堡 |
상위어 | 병영(兵營), 방어영(防禦營), 진(鎭) |
관련어 | 밀무역(密貿易), 범월(犯越), 진보(鎭堡)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안정보(安定堡)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3년 6월 20일 |
조선시대 함경도 갑산군에 설치한 군사시설인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여러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안정보가 소속돼 있는 갑산군(甲山郡)은 본래 허천부(虛川府)였는데, 조선초기에는 호인(胡人)들에게 점거되어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으면서 거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려시대에 갑산만호부였던 것이 조선에 와서 1413년(태종 13)에 갑산군으로 고쳐졌다. 안정보는 갑산군 북쪽 압록강 변에 설치되어 외적을 감시하고 주민을 보호하며 연락을 주고받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갑산군의 북쪽 압록강 변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안정보가 세조대에 혁파되면서 자세한 위치는 현재 비정할 수 없다. 1457년(세조 3) 안정보와 운총보(雲寵堡)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상언한 내용에는 두 보가 본래 내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널리 흩어져 살았는데, 근래 보를 설치하고 각자 입보하게 하니, 농사철이면 혹은 20리(약 8㎞), 혹은 10여 리(약 4㎞)의 땅을 왕래하면서 밭 갈고 김을 매야 해서 농사가 부실해져 생활이 힘들다는 호소가 실려 있다(『세조실록』 3년 6월 20일). 이 내용으로 볼 때 안정이라는 지역은 본래 압록강 변이 아니라 내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보를 설치하면서 압록강 쪽으로 올라간 것이다. 한편 『해동역사』에는 이와 다른 내용이 실려 있다. 두만강 바깥쪽 지역은 본래 우리나라의 지역에 속하는데 국초에 영파보(寧波堡), 진지달보(榛遲達堡), 안정보 등의 진을 설치하였다가 세종조 이후로 모두 폐지하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대로라면 안정보는 두만강 건너편에 있던 진보라고도 볼 수 있다.
안정보의 역할은 지역민을 야인들로부터 보호하고, 국경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진보의 역할은 위로 소속 진관의 지휘에 따라 군사활동을 전개하고, 아래로는 소속 파수처를 책임지고, 봉수를 관리하여 위급상황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안정보와 같이 국경 인근에 소재한 진보는 범월(犯越)과 밀무역을 단속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변천 및 현황
『조선왕조실록』에 안정보에 대한 기록은 1457년(세조 3) 기사가 유일하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1458년(세조 4)에 폐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1457년(세조 3) 보의 백성들이 올린 상언이 폐지의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정보는 폐지 이후 조선후기 지도나 지리지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참고문헌
- 『해동역사(海東繹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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