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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내정 궁전의 이름.

개설

북경자금성의 내정(內廷) 궁전으로 건청궁 교태전과 더불어 후삼궁(後三宮) 중의 하나였다. 교태전의 북쪽에 위치하였다. 곤녕궁은 황제의 침궁인 건청궁(乾淸宮)과 쌍을 이루었다. 궁실의 명칭은 “건(乾)은 하늘로서 지아비를 의미하며 곤은 땅으로 지어미를 의미한다.”는 『주역』의 내용과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 평안하다.”는 『도덕경』의 구절에 연원하였다. 명·청의 시기에 곤녕궁은 황후의 정궁으로 사용되었고 간혹 비빈들이 이곳에 거주하기도 하였다. 1596년(만력 24) 건청궁과 곤녕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중건에 공역을 보태기 위한 논의가 있었고(『선조실록』 32년 윤4월 23일), 1599년에는 왕이 배신을 보내어 공역을 돕기 위한 토산물을 진헌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포유(褒諭)하고 이어 백금과 망의를 하사한 기록이 있었다(『선조실록』 32년 3월 8일)(『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21일).

위치 및 용도

청조는 비록 이 궁전을 황후의 거처인 중궁(中宮)으로 하였으나 옹정제 이후 동난각(東暖閣)이 황제의 혼례시 동방(洞房)으로 사용될 뿐이었고, 결혼식이 끝난 후 황후는 곤녕궁의 동서쪽에 위치하는 12곳의 궁원 중 하나를 선택하여 갔다. 평시 곤녕궁은 만주족 전통 신앙의 제례 장소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1420년에 처음 건설되었고 1440년에 중수되었다. 1514년과 1596년 화재를 입고 중건되었다. 1655년 내궁을 중수할 때 곤녕궁 역시 중수되었고, 1697년 곤녕궁의 동난각(東暖閣)이 건축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강희 연간의 궁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형태

전면은 9칸으로 깊이는 3칸으로 겹처마에 용마루가 5개 얹어져 있는 무전정(廡殿頂)의 형태였다. 그중 동·서 양측은 남쪽 교태전(交泰殿)과 북쪽 곤녕문(坤寧門)으로 통하는 길이 있어 실내는 총 7칸이었다. 7칸은 총 3부분으로 나뉘는데 동쪽 2칸은 동난각으로 황제의 신혼방으로 사용되었고 가운데 4칸은 순치연간 만주풍으로 재건되면서 만주족 샤먼 제사의 주요장소로 사용되었다. 서·북·남쪽으로 ‘ㄷ자형’ 만주식 구들이 설치되어 있고 출입문의 맞은편에는 주방이 설치되어 제사에 동물을 희생시킬 때 사용되었다. 나머지 서쪽의 한 칸은 불교 관련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1. 00015623_그림1_「명대북경자금성전우위치도(明代北京紫禁城殿宇位置圖)」,『중국고대건축사(中國古代建築史)』, 중국건축공업출판사, 1984.

참고문헌

  • 劉敦楨, 『中國古代建築史』, 中國建築工業出版社, 1984.
  • 鄭天挺·吳澤·楊志玖 主編, 『中國歷史大辭典』, 上海:上海辭書出版社, 2000.
  • 何本方·嶽慶平·朱誠如 主編, 『中國宮廷文化大辭典』, 昆明:雲南人民出版社, 2006.
  • 유지원, 「청대황실제사의 샤머니즘적 성격-당자(堂子)와 곤녕궁 제사를 중심으로-」, 『명청사연구』 23, 명청사학회, 2005.
  • 姜相順, 「清宫萨满祭祀及其历史演变」, 『淸史硏究』, 1994.
  • 張亞輝, 「清宮薩滿祭祀的儀式與神話研究」, 『淸史硏究』,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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