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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3 기준 최신판



중국 북경 자금성의 정남쪽에 위치한 문. 혹은 심양에 위치한 고궁(古宮)의 정문.

개설

대청문은 북경 자금성의 정남쪽에 있었던 문이다. 명나라 때 자금성을 건립하면서 대명문(大明門)으로 건립되었던 것이 청대에 대청문으로 개칭되었다.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또한 청의 입관 이전인 후금(後金) 시기에 만들었던 심양의 궁궐에 있는 정문을 지칭하기도 한다.

변천 및 현황

1406년 명의 황제인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남경(南京)의 궁전을 모방해 궁전을 짓도록 하였다. 그 결과 1420년 자금성이 건립되었다.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午門)의 정남쪽에 대명문을 세웠다. 남쪽 방향이 지니던 존귀한 의미 때문에 대명문은 국문(國門)의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1644년 청의 입관 이후 대명문은 대청문으로 개칭되었다가, 신해혁명(辛亥革命) 직후인 1912년 중화문(中華門)으로 개칭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은 1952년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을 만들면서, 중화문을 헐었다. 그 터에 1958년 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를 세웠고, 모택동(毛澤東) 사후 1년 뒤인 1977년에 모주석기념당(毛主席紀念堂)이 건립되었다.

한편 입관 이전인 1625년 후금은 심양에 궁궐을 지었다. 청의 태조와 태종이 사용하였던 이 궁궐은 현재 심양고궁(瀋陽故宮)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남아 있다. 청의 입관 후에는 계속하여 별궁(別宮)으로 이용되었으며, 이후 청조의 황제가 행차하여 머물기도 하였다. 심양고궁의 정문이 대청문인데, 오조문(午朝門)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의 사신들은 현재의 북경인 연경(燕京)에 파견되거나(『정조실록』 23년 10월 12일) 혹은 청나라 황제가 심양 궁궐로 행차하여 그곳에 파견되었을 때 대청문 바깥에서 황제의 명령을 기다렸다(『정조실록』 2년 9월 11일)(『순조실록』 5년 9월 10일).

참고문헌

  • 이블린 S. 로스키 지음, 구범진 옮김, 『최후의 황제들: 청 황실의 사회사』, 까치, 2010.
  • 董鑒泓 外編, 成周鐸 譯註, 『中國都城發達史』, 學硏文化社, 1993.
  • 류지원, 「“한궁(汗宮)”에서 “황궁(皇宮)”으로: 심양 고궁의 문화적 함의」, 『중국사연구』 57, 2008.
  • 류지원, 「변성에서 도성으로」, 『동양사학연구』 105,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