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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3 기준 최신판



조선후기 인조대에 창덕궁 후원에 조성된 정자.

개설

취규정(聚奎亭)은 병자호란을 겪은 얼마 후인 1640년(인조 18)에 조성된 정자이다. 이름의 속뜻은 ‘학문이 번창하여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깊은 공간인 옥류천(玉流川)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휴식과 독서의 공간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순종대에는 취규정을 가게처럼 꾸며 신하들에게 음식을 베풀었다.

위치 및 용도

존덕정(尊德亭)에서 옥류천으로 가는 산마루턱에 위치한 정자이다. 헌종대에 쓰인 『궁궐지(宮闕志)』에는 취한정(翠寒亭)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었다.

취규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별들이 규성(奎星)으로 모여든다.’는 의미이다. 규성은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로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로 일컬어진다. 곧 규성 주위로 다른 별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인재가 모여들어 천하가 태평해짐을 의미한다. 967년(송 태조 5)에 5개의 별이 학문과 문장을 관장하는 별인 규성에 모였는데 이후부터 천하가 태평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취규정은 ‘학문이 번창하여 천하가 태평하게 되는 정자’라고 할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1636년(인조 14)에 인조는 창덕궁 후원에 옥류천을 조성하고, 태극정(太極亭)·청의정(淸漪亭)·소요정(逍遙亭) 등의 정자를 지었다. 이후 1640년(인조 18)에는 낙민정(樂民亭)·심추정(深秋亭)과 함께 취규정을 창건하였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층이다. 팔작 기와지붕으로, 창호나 벽이 없이 4면이 모두 개방되었다. 장대석 외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사다리형 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엮었다. 정자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 중앙은 우물천장으로 만들었다. 전면의 중앙 칸 외에는 모두 난간이 둘러졌다.

관련사건 및 일화

순종대에는 취규정·옥류천·육각정(六角亭)에 모의점(模擬店)을 설치하고, 신하들에게 음식을 베풀었다(『순종실록부록』 5년 4월 16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이광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 최종덕,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눌와, 2006.
  • 한영우,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열화당,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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