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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7 기준 최신판



전국의 주요 산과 강에서 시행되었던 제사.

개설

한국에서 산천제의 존재는 단군(檀君)이 아사달(阿斯達)의 산신(山神)이 되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서 보듯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지방민의 산천신앙이 활발했을 뿐 아니라 건국 시조와 연결시켜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를 운영하기도 하였는데, 통일신라에서는 더 나아가 전국의 산천을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등급을 구분하였다. 이런 방식을 본받은 고려시대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산천 제사가 이루어졌다.

산천제는 영토 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특히 기우(祈雨), 기청(祈請) 등 백성들의 실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된 농경 제사의 일종이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소홀이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통치자들은 산천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국가의 사전(祀典) 체계에 포함시켰는데, 기존의 산천제에 내포된 무속적·도교적인 성격은 배제하고 대신 유교적인 제사로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산천제는 그 중요도에 따라 중사와 소사로 구분되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실렸는데, 이 규정에 따라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제사가 유지되었다.

연원 및 변천

산천제는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태백산(太伯山), 아사달, 백악산(白岳山) 등의 산악신앙 및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보이는 하백신앙(河伯信仰) 등에서 보듯이 일찍부터 그 존재가 나타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각국에서 산천을 호국(護國)의 대상으로 삼았고, 통일신라에서는 전국의 산천을 당나라의 사전 방식을 도입하여 전국의 산천을 대사·중사·소사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산천신앙이 성행했음은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다양한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사』「예지(禮志)」에는 산천제가 대사·중사·소사의 편제가 아닌 잡사(雜祀)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고려사』를 편찬했던 조선초기의 학자들이 고려의 산천제를 유교적인 제사가 아닌 민간의 산천신앙으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산천제의 정비는 태종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유자들은 고려시대 이전의 산천제를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비판하였다. 첫째, ‘천자는 천지(天地)를 제사하고, 제후는 경내 산천을 제사하는 것’이 예의 원칙이기 때문에 산천의 제사를 민간에서 시행할 수 없고, 둘째, 산과 강을 태왕·태후, 공작·후작·백작 등으로 봉(封)하여 부르는 것은 부당하며, 셋째, 산천의 제단이나 사묘에는 해당 신위뿐 아니라 그들의 처첩·자녀 등을 흙으로 빚은 형상[塑像]이 존재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고치기 위하여 산천제는 반드시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이 주관해야 하고, 산천의 봉작은 모두 폐지하며, 소상은 전부 폐기하되 주신(主神) 1위만 신주의 형태로 남길 것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상과 같은 기존의 무속신앙 및 도교적인 성격을 제거하면서 유교적인 산천제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1414년(태종 13)에 이르러 산천제의 대상은 그 중요도에 따라 2가지 등급으로 나뉘어졌다. 즉 전국의 중요한 산과 바다, 강을 악해독(嶽海瀆)으로 구분하여 중사로 삼은 반면 나머지의 주요 산과 강을 소사로 각각 정하였던 것이다(『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국가 제사에 편입됨과 더불어 해당 산천의 제단이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고, 세종대 초반에 이르러 제사 때 사용할 음식을 조리할 공간인 신주(神廚), 관련 물품을 보관하는 고방(庫房) 등의 부속시설이 마련되었다. 아울러 1431년(세종 13)에는 각지의 산천에 신사위전(神祠位田) 1결 50부씩을 배정하여(『세종실록』13년 3월 6일) 경비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여 산천제의 안정적인 운영을 꾀하였다.

위와 같은 산천제 관련 사항들은 세종 사후에 편찬된 예전인 『세종실록』「오례」에 기재되었고, 성종대 『국조오례의』에 다시 수록됨으로써 제도적인 완성을 보았다. 이후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각지의 산천제는 조선시대 전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절차 및 내용

산천제의 시행 절차는 크게 준비과정과 행례(行禮)의 2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준비과정은 제사 3일 전부터 당일 행례 때까지의 재계(齋戒), 진설(陳設), 성생기(省牲器) 등을 포함한다. 산천제의 헌관(獻官)은 소재지의 관찰사(觀察使) 혹은 수령(守令)이 담당한다. 제사 3일 전부터 헌관은 재계를 시행하는데, 산재(散齋)가 2일이고, 치재(致齋)는 1일이다. 산재는 제관(祭官)이 치재에 앞서 몸을 깨끗이 하고 행동을 삼가는 것으로, 일상 업무는 정상적으로 수행했으며 평소의 자기 집의 침소에서 잤다. 치재는 산재 이후 제사가 끝날 때까지 재계하는 것으로, 치재 기간에는 전적으로 제사에 관련된 일에만 전념하였다. 진설은 제사 1일 전부터 당일까지 제수 및 헌관의 자리 등을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제사 전날 헌관은 제사에 쓸 희생과 제기를 살피는데, 산천제에 쓸 희생은 돼지 1마리이다. 신위의 명칭은 산의 경우 모산지신(某山之神)이라 하고, 강의 경우 모천지신(某川之神)이라고 쓴다.

본격적인 제사의식은 신위에게 폐백을 올리는 전폐(奠幣)와 세 번에 걸쳐 술을 올리는 삼헌례(三獻獻), 그리고 음복(飮福)과 수조(受胙) 이하의 마무리 의식으로 구분된다. 전폐는 먼저 산천의 신위에게 3번에 걸쳐 향을 피우는 삼상향(三上香) 뒤에 폐백을 올리고 이후에 몸을 엎드린 후에 일으켜 편 후 자리로 돌아온다.

전폐가 끝나면 3번에 걸쳐 술을 올리는 헌례가 시행되었다. 산천제는 헌관이 1인이기 때문에 그가 3헌을 모두 시행하였다. 먼저 헌관이 신위에게 술잔을 올린 뒤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축인(祝人)이 축문을 읽는다. 끝나면 헌관이 몸을 엎드린 후에 일으켜 편다. 초헌(初獻)이 끝나면 헌관은 다시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이어서 시행한다. 아헌례과 종헌례를 시행할 때는 축문을 읽는 과정이 없다.

삼헌례가 끝나면 헌관이 제사에 올린 술과 고기를 맛보는 음복과 수조를 시행하고 몸을 엎드린 후에 일으켜 편다. 음복례가 끝나면 집사들이 4배를 시행한 뒤 제기를 거둔다. 헌관은 폐백을 구덩이에 묻는 과정을 지켜본 후 퇴장한다. 여러 집사들이 신위판을 봉안하면 의식이 종결된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산천제는 농경을 비롯한 백성들의 실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교적인 제사 방식을 고집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심각한 가뭄이 지속될 경우 산천에서 시행되는 기우제를 무당이 주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특히 성황제와 결합되어 시행될 경우 그 경향성은 좀 더 짙어졌다. 사실 지방의 산천에서 시행되는 빈번한 제사에 관찰사를 비롯한 지방관이 매번 참석하기는 쉽지 않았고, 그럴 경우 향촌민들에 의해 무속의식이 개입될 여지가 컸다. 16세기 이후 사림들이 지방 산천제를 음사(陰祀)로 규정했던 것은 그러한 이유인데, 이러한 경향은 17세기 이후 점차 약화되었지만 완전히 배제시키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명집례(明集禮)』
  • 『춘관통고(春官通考)』
  • 『구당서(舊唐書)』
  • 『송사(宋史)』
  • 『신당서(新唐書)』
  • 『예기(禮記)』
  • 『홍무예제(洪武禮制)』
  • 김문식·한형주·이현진·심재우·이민주, 『조선의 국가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김철웅, 『한국중세의 吉禮와 雜祀』, 경인문화사, 2007.
  • 이범직, 『한국중세 예사상 연구』, 일조각, 1991.
  •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비, 2009.
  • 채미하,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 2008.
  • 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 최종성, 『조선조 무속 국행의례 연구』, 일지사, 2002.
  •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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