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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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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종친연조정사의 |
한글표제 | 종친연조정사의 |
한자표제 | 宗親宴朝廷使儀 |
상위어 | 빈례(賓禮) |
관련어 | 영조서의(迎詔書儀), 영칙서의(迎勅書儀), 예조연조정사의(禮曹宴朝廷使儀), 왕세자연조정사의(王世子宴朝廷使儀) |
분야 | 왕실/왕실의례/빈례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송지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종친연조정사의(宗親宴朝廷使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2년 6월 5일 |
종친(宗親)이 중국 사신을 위해 연향하는 의식.
개설
중국 황제의 조서나 칙서를 가져온 사신에게 종친이 베푸는 연향이다. 왕이 베푸는 연향은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라 하여 의례 앞부분에 다례(茶禮)를 포함하지만 종친이 베푸는 연향에서는 다례가 생략되어 차이가 있다. 그러나 술을 제7잔까지 돌리는 점은 두 의례가 동일하다. 사신은 태평관(太平館)에서 연향을 받았다. 종친이 태평관에 도착하면 의례를 시작하였다. 조서나 칙서를 받는 영조서의(迎詔書儀)나 영칙서의(迎勅書儀)가 의례적 측면이 강한 것에 비해 종친연조정사의(宗親宴朝廷使儀)는 연향의 성격이 강한 의례이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에 중국과의 외교는 사대(事大)의 예로 행해졌다. 이는 교린(交隣)의 예로 행하는 일본·유구국(琉球國) 등 이웃 나라[隣國]와의 외교와 그 위격이 구분된 것이다. 중국 사신을 위한 연향은 왕·왕세자·종친이 각각 주체가 되어 베풀었는데, 이 점은 조선시대 내내 동일하였다. 다만 시기별로 담당 관서와 담당 관원의 명칭이 바뀌는 변화가 보였으나 의례의 큰 틀에서는 시기별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1402년(태종 2)에 예조(禮曹)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와 함께 사신연의 음악을 제정할 때에는 종친연조정사의에 관한 내용이 없고 의정부(議政府)에서 사신을 위해 베푸는 연향에 쓰이는 음악을 정한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2년 6월 5일).
절차 및 내용
정사(正使)의 자리는 태평관의 정청(正廳) 북벽에 남향하여, 부사(副使)의 자리는 동벽에 서향하여, 종친의 자리는 서벽에 동향하여 설치한다. 이는 연조정사의에서 북벽은 비워 두고 정사의 자리는 동벽에 서향하여 설치하고 왕의 자리는 서벽에 동향하여 설치하는 것과 비교된다. 의례는 종친이 사신과 읍례(揖禮)를 하는 것으로 시작되며 제1잔(盞), 진찬탁(進饌卓), 진화(進花), 제2잔, 진소선(進小膳), 제3잔, 진탕(進湯), 제4잔, 진탕, 제5잔, 진탕, 제6잔, 진탕, 제7잔, 진탕, 진대선(進大膳), 읍례의 순으로 행한다.
읍례를 행하고 사신과 종친이 자리에 앉으면 전악(典樂)이 노래를 부르는 가자(歌者)와 금(琴), 슬(瑟)을 연주할 악인을 이끌고 동서쪽으로 나누어 올라가 음악을 연주한다. 술은 종친이 사신에게 먼저 올리고 사신이 종친에게 이어 올리는 순서로 행한다. 매 술을 올릴 때 과일이 제공된다. 술은 사준별감(司樽別監)이, 과일은 사옹별좌(司饔別坐)가 담당하여 올렸다.
제1잔을 올릴 때 음식상을 내며 꽃을 올린다. 제2잔에 소선을 함께 올리며 제3잔부터 제7잔 사이에는 매 잔마다 탕을 올린다. 제7잔 이후에는 대선을 올리는 절차로 의례를 행한다. 제2잔과 제3잔 사이에 올리는 소선은 고기를 베어 올리지만 제7잔에 올리는 대선의 고기는 베지 않고 올린다. 소선은 노래를 담당한 가자 등에게도 제공된다. 매 잔은 주고받는 방식으로 제공된다. 즉 종친이 사신에게 술을 올리면 이어 사신이 종친에게 술을 올리는 방식이 제7잔까지 계속된다. 매 잔을 올릴 때마다 음악을 연주한다. 제7잔 이후 의례가 끝나면 음악 연주를 그치고 종친이 나간다. 의정부와 육조(六曹)에서 연회하는 의식도 이와 같지만 이 경우 집사자가 지인녹사(知印綠事)로 바뀐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통문관지(通文館志)』
- 『춘관통고(春官通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