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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7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야외 매장의 장례 풍습.

내용

고빈(藁殯)은 야외 매장의 장례 풍습을 일컫는 말로, 초빈(草殯)·출빈(出殯)·외빈(外殯) 등의 용어로도 쓰인다. 사자(死者)의 살을 완전히 썩혀 2~3년 뒤 뼈를 씻어 다시 땅속에 묻는 까닭으로 복장제(復葬制)·이중장제(二重葬制)라고도 한다. 남해와 서해의 섬 지역에 아직 남아 있는 풍습으로, 현지에서는 빈수[殯所]·최빈(초빈)·예빈(외빈)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빈은 원래 전염병으로 죽었거나 어린아이가 죽었을 경우, 객지에서 죽었거나 집이 가난해서 장지를 구하지 못할 경우에 주로 시행되었다. 조선시대 대규모의 전염병이 돌 때에는 시신 또는 관을 땅에 놓고, 짚이나 풀 등으로 엮은 이엉을 덮어 만든 임시 풀 무덤이 많았다. 이는 미처 땅을 파고 시신을 묻을 여유조차 없었던 당시의 위급했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용례

庚子 諫院申前啓 又言 癘氣日熾 死亡相續 都城外至近之地 藁殯病幕 羅絡碁布 接連閭里 夾路纍纍 薰染滋蔓 實由於此 且因淫潦彌月 水漲岸崩 虆梩亦多暴露 病者間致壓沒 請申飭諸部 偪側禁城 密邇人家者 劃卽移埋 上只從末端事(『숙종실록』 43년 6월 17일)

朔戊申 藥房入診 診候畢 提調閔鎭厚言 都城民人 死於癘疫者 不可數計 殭屍相屬於道路 其無主者 固不須言 而雖有主者 家人方皆染痛 不能收屍 或全然委棄 或藁殯半露 穢氣逼人 行路幾不通 宜令漢城府 定一郞官及部將專管 一一埋於禁標外 雖不能各成墳形 同埋一大坎 亦無不可(『숙종실록』 44년 7월 1일)

참고문헌

  • 정종수ㆍ최순권, 『한국의 초분』, 국립민속박물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