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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6 기준 최신판



국왕이 친림(親臨)하여 문과(文科)의 전시(殿試)를 치르는 의식.

개설

조선시대의 문과는 3년에 1번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문과(式年文科)와 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춘당대시(春塘臺試)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실시하는 비정기 시험으로 나뉜다.

식년문과에서는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3단계 시험을 통해 33인을 선발하였다. 초시는 성균관(成均館), 한성부(漢城府), 각 도에서 나누어 실시하였고, 240인을 뽑았다. 복시는 초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하며 33인을 선발하였다. 전시는 복시 합격자 33인의 서열을 확정하는 시험으로, 등급은 갑과(甲科) 3인, 을과(乙科) 7인, 병과(丙科) 23인으로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에서 식년문과의 전시가 처음 실시된 것은 1393년(태조 2)이다. 그해 6월에 태조가 보평전(報平殿)에서 복시 합격자 33인을 시험하여 송개신(宋介臣)을 수석으로 삼았다(『태조실록』 2년 6월 13일).

1429년(세종 11)에 예조(禮曹)에서 문과전시 당일에 시행할 의례(儀禮)를 처음 제정하여 올렸고, 세종이 이를 수용하였다(『세종실록』 11년 1월 24일). 1450년(문종 즉위)에 다시 예조에서 문과 전시의 의주(儀注)를 수정하여 올렸는데, 이는 당시 국상(國喪) 중이었기 때문에 세종 대에 제정한 의주를 국상의 상황에 맞도록 일부 개정한 것이었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정리된 문과전시의는 『세종실록』 「오례」에 수록되었다(『세종실록』 오례 가례 의식 문과 전시의). 이후 집사관(執事官)의 명칭만 약간 바뀌었을 뿐 절차의 내용은 큰 변동 없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반영되었고, 조선후기의 『춘관통고(春官通考)』에도 계속 이어졌다.

문과전시는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 창경궁의 명정전(明政殿) 등 궁궐의 정전(正殿)이나 국왕의 집무실 앞에서 주로 거행되었다(『중종실록』 21년 9월 26일)(『명종실록』 11년 2월 12일)(『정조실록』 즉위년 10월 1일). 궁궐 밖에서 문과전시가 거행된 사례로는 1506년(연산군 12)에 태평관(太平館)에서 전시를 실시한 일이 있으며(『연산군일기』 12년 4월 15일), 숙종대와 영조대에도 당시 국왕이 거처하던 궁궐이 아닌 경희궁 숭정전(崇政殿)으로 장소를 옮겨 전시를 실시한 사례가 있다(『숙종실록』 9년 10월 15일)(『영조실록』 38년 4월 12일).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문과전시의 절차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조오례의』에서는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전시를 실시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절차를 정리하였다. 문과전시를 주관하는 집사관은 정2품 이상의 독권관(讀卷官), 정3품 이상의 대독관(代讀官), 승지(承旨)가 맡는 전교관(傳敎官), 통례원(通禮院) 관원인 전의(典儀), 장악원(掌樂院) 관원인 협률랑(協律郞)으로 모두 5명이다.

전시 1일 전에 액정서(掖庭署) 관원과 전악(典樂) 등이 근정전에 어좌(御座)와 향안(香案), 각종 악기, 독권관·대독관 등의 전시 집사관, 전시 응시자, 기타 관리들의 자리를 설치하며, 예조 정랑(正郎)은 시제판(試題板)을 설치한다. 한편 전시 전날에 거인들이 답안을 작성할 종이를 예조에 제출하면 예조에서는 접수한 종이에 어보(御寶)를 찍어서 시험 당일에 돌려주었다.

전시 당일에는 먼저 시신(侍臣)의 자리와 독권관·대독관·응시자 등의 절하는 자리인 배위(拜位)를 설치하고, 의식 진행을 돕는 전의·찬의(贊儀)·인의(引儀) 등의 자리도 배치한다. 국왕의 행차가 근정전에 도착하여 국왕이 어좌에 오르면 관원들도 각자의 위치로 가서 정렬한다. 전의의 인도에 따라 먼저 시신들이 국왕에게 사배(四拜)를 실시한다. 이어 독권관 이하의 관원들과 응시자들도 인의의 인도에 따라 배위로 나가 국왕에게 사배한 다음 다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간다. 독권관이 국왕의 교지(敎旨)를 받아 시제(試題)를 쓰면, 대독관은 시제를 받들고 전교관을 따라 뜰로 나온다. 전교관이 교지가 있음을 알리면 응시자들이 찬의의 지시에 따라 모두 꿇어앉으며, 대독관은 시제를 인의에게 전달한다. 시제를 받은 인의가 이를 시제판에 나누어 붙이고, 응시자들은 찬의의 인도에 따라 사배를 한 후 일어나 바로 선다. 좌통례(左通禮)가 국왕에게 의식이 끝났음을 아뢰면, 독권관 이하 관원들이 뜰로 내려와 서고 국왕은 자리에서 내려와 여(轝)를 타고 안으로 들어간다. 국왕의 행렬이 사정전으로 들어가고 의장(儀仗)을 모두 거두면, 응시자들은 시제판 앞으로 나아가 시제를 베껴 쓴 다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답안을 작성하며,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답안지인 시권(試券)을 제출하고 밖으로 나간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민음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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