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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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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반승 |
한글표제 | 반승 |
한자표제 | 飯僧 |
동의어 | 공양승중(供養僧衆), 재승(齋僧) |
관련어 | 일재(日齋), 재청승(齋請僧), 우란분재(盂蘭盆齋), 대중공양(大衆供養), 승재(僧齋), 재(齋)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의식·행사 |
집필자 | 이성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반승(飯僧)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8년 3월 29일, 『태조실록』 1년 10월 11일, 『세종실록』 24년 3월 24일, 『태조실록』 4년 7월 12일, 『세종실록』 2년 6월 6일, 『세종실록』 20년 2월 19일, 『세종실록』 24년 1월 5일 |
청정한 승려에게 음식을 베풂으로써 불교에 대한 신심과 귀의를 표하는 의식.
개설
공양승중(供養僧衆) 즉 승려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의미로 재승(齋僧)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재(齋)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승(飯僧)은 불교 초기부터 재가신도가 승려에게 행하는 보시로 출발하였는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의례로 정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음식을 대접 받는 승려의 수에 따라 오백승재, 천승재, 만승재 등으로 구분되었으며, 외적의 퇴치와 천재(天災)의 소멸 등을 기원하는 국가적 기양 의례로 널리 시행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기일에 선왕의 명복을 빌거나 탄일에 장수를 기원하는 개인적인 차원의 기복(祈福) 의례로 행해졌고, 규모도 1,500명, 500명, 108명 등으로 점차 축소되었다. 이후 조선중기에는 공식적인 의식으로서의 반승은 사라지고, 일반적인 ‘재’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었다. 오늘날에는 대중공양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연원 및 변천
반승은 불교 신도들이 신심과 귀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면서 비롯되었다. 불교가 발생할 당시 인도에서는 승려들이 늘 밥을 빌어서 생활하는 것[常行乞食]이 원칙이었다. 승려들이 아침마다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로 7곳의 인가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구한 다음 그것을 한꺼번에 모아서 사찰에서 먹었다. 점차 신도들이 늘어나면서, 신도들이 음식을 만들어 사찰에 가져와 석가모니와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후에는 『우란분경』에 나타나듯이, 청정한 승려에게 공양을 올림으로써 그 복덕을 죽은 이의 명복을 빌어 하늘에 나게 하는 곳으로 돌리는 공덕 행위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이 시주(施主)가 되어 사원에서 수시로 반승을 베풀었는데, 순수하게 반승만 베푼 것은 아니며 법회나 도량 등이 있을 때 함께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반승은 그 기능과 목적에 따라 호국(護國)·천도(薦度)·탄일축수(誕日祝壽)·경찬(慶讚)·구병(救病) 반승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호국반승은 호국 경전인 『인왕반야경』을 읽으며 국가의 안태를 기원하는 법회에서 주로 시행되었고, 천도반승은 혼전법석, 칠칠재, 소상 등에서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베풀어졌다(『세종실록』 28년 3월 29일). 탄일축수반승은 왕과 왕후의 생일에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설행하였으며(『태조실록』 1년 10월 11일), 경찬반승은 사찰의 창건과 중수, 또는 불상을 조성하여 안치하거나 사경(寫經)을 마쳤을 때 이를 경축하는 법회에서 행하였다(『세종실록』 24년 3월 24일). 구병반승은 병을 구제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태조실록』 4년 7월 12일) (『세종실록』 2년 6월 6일).
반승은 고려시대 초기에는 주로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려는, 다시 말해 호국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적인 차원의 의식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몽고의 간섭이 본격화된 고종 이후에는 개인의 기복 또는 추천(追薦)에 중점을 두는 의례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특히 억불숭유를 표방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가 차원에서 호국을 목적으로 반승을 베푸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불교를 독실하게 신앙한 태조 등에 의해 왕실 차원에서 탄일과 기일을 기념하고 병을 구제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일재(日齋)라는 반승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하루 또는 한 끼에 한정하여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것을 말한다. 민간에서는 한두집이나 네댓집 혹은 수십집이 공동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궁의 환관이나 별감, 대군(大君)과 군(君) 및 문무(文武)의 재상, 부유한 상인들은 독자적으로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 공양했다. 왕실이나 부유층이 베푸는 반승은 성대한 축제와 같았다고 한다(『세종실록』 20년 2월 19일). 『조선왕조실록』의 이 같은 기록은 국가적인 의례로 행해지던 반승이 민간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하절기와 동절기에는 만행을 하지 않고 일정한 장소에 머물며 참선 또는 염불에 힘쓰는 안거 승려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안거반승도 행해졌다(『세종실록』 24년 1월 5일). 안거반승은 오늘날까지도 대중공양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절차 및 내용
반승은 그 시행 방법에 따라 승려들이 머물고 있는 사찰에 가서 음식을 베푸는 방법과, 승려들을 초청해 음식을 베푸는 방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는 재청승(齋請僧)이라고 한다.
반승의 절차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에는 『석문의범』의 「대심경」과 「소심경」이 있는데, 「소심경」에 기록된 차례는 다음과 같다. 발우(鉢盂)를 내리는 하발, 돌려놓는 회발, 발우를 펴는 전발 게송과 진언을 염송한 이후에 ‘십념’을 하면서 공양물을 대중들에게 나눈다. 그 뒤 음식의 공덕을 노래하고 음식을 받는다. 이후 불법승삼보진언·계장진언·정결도진언·혜철수진언 등을 염송한다. 이어 밥을 받드는 게송과 오관게송을 염송한 뒤, 아귀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생반게송과 진언·정식진언과 게송·삼시게송을 염송한 후 공양을 받는다. 음식을 다 먹은 뒤에는 절수게송과 진언을 하며 발우를 씻고, 해탈주를 염송하여 일체 중생의 해탈을 발원하고 발우를 걷는 게송으로 공양을 마친다.
참고문헌
- 안진호, 『석문의범』, 법륜사(前卍商會), 1935.
- 김용조, 「조선전기의 국행기양불사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 이재창, 「麗代 飯僧攷」, 『불교학보』1,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196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