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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4 기준 최신판



국장(國葬)에서 발인을 거행할 때 행렬이 건너는 교량에서 지내던 제사.

개설

국장 발인 중에 지나가는 교량에서 지내던 제사를 말한다. 교량을 건너기 전에 국장 행렬의 안녕을 위해 해당 지신(地神)에게 지내던 제사이다. 발인 시에는 교량 이외에도 명산대천이나 도로에도 제사를 지냈다. 조선왕조의 능침이 위치한 동구릉과 서오릉 방향으로 가려면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과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을 통해 나가야 했다. 따라서 그 문으로 가는 도로상의 교량에 대한 제사가 거행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전기부터 왕실 장례에서 발인을 거행할 때 교량제를 시행했다. 종친(宗親)과 대신(大臣)의 예장(禮葬)에서는 거행하지 않았다(『세종실록』 6년 3월 14일). 교량제는 조선후기에도 지속되었다. 다만 효종대에는 발인하는 날 교량제를 행하고, 장사를 치르고 반우(返虞)할 때에도 교량제를 지냈다. 그런데 총호사 이경석이 조선전기에 발행된 『오례의(五禮儀)』에는 발인하는 날에만 궁문과 성문 및 50개의 신위(神位)에 제사하고 또 통과하는 교량과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낸다고 되어 있고, 반우의(返虞儀)에는 제사를 거행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한다. 이는 전란 후에 잘못된 규례를 답습하였고, 전란 이전의 것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여 반우 시의 교량제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반우할 때의 교량제는 사라졌고 발인할 때에만 전례대로 제사를 거행하였다. 또한 행차 시 지나는 모든 교량에 제사할 수 없으니 장천(長川)의 대교(大橋)에서만 행하도록 청하였다[『효종실록』 즉위 8월 18일 2번째기사].

절차 및 내용

조선전기 오례의(五禮儀)가 정비될 때인 1441년(세종 23)에 정리된 교량제는 다음과 같다. 교량제에는 5품의 헌관(獻官), 문관(文官) 참외(參外)의 축사, 참외인 알자(謁者) 1명, 찬자(贊者) 1명, 재랑(齋郞) 1명이 참여하였다.

1) 제사를 지내기 전에 집사자가 소속 인원을 거느리고 제사 지낼 장소를 청소하고, 제사에 쓸 음식을 두는 찬만(饌幔)을 땅의 형편에 따라 적당하게 설치한다.

2) 제사는 축시(丑時: 오전 1시~2시) 1각(刻: 15분)에 한다.

3) 축시 전인 5각(刻)인 3경(更) 3점(點)에 집사자가 신위(神位)를 교량의 왼편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완석(莞席)을 깔아 놓는다.

4) 헌관의 위치는 신위의 동남쪽에 서향하여 설치하고, 집사자의 자리는 그 뒤에다가 서향하여 설치하되,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5) 알자와 찬자의 자리는 헌관의 서남쪽에 설치하되, 북쪽을 상으로 한다.

6) 축판(祝版)을 신위의 오른편에 올려놓고, 향로와 향합 및 초를 신위 앞에 진설한다.

7) 제기(祭器)를 진설하고 찬구(饌具)를 담는데, 변(籩)은 넷으로 왼편에 있게 하고, 두 줄이 되게 한다.

8) 제물을 설치한 첫째 줄에는 건조(乾棗)와 율황(栗黃)의 순서, 둘째 줄에는 개암[榛子]과 잣[栢子]의 순서로 둔다.

9) 보(簠)와 궤(簋)가 각각 둘인데, 변(籩)과 두(豆) 사이에 있게 한다.

10) 보는 왼편, 궤는 오른편에 두는데, 보에는 기장[黍]과 수수[粱]를 담는데, 수수가 기장 앞에 있게 하고, 궤에는 기장과 직(稷)을 담는데, 직이 기장 앞에 있게 한다.

11) 작(爵)이 하나인데, 보와 궤 앞에 있게 한다.

12) 준(尊)을 신위 앞의 동남쪽에 북향하여 설치하고, 또 그 동남쪽에 그릇을 씻는 세(洗)를 설치한다.

13) 손을 씻는 관세(盥洗)는 동쪽, 술잔을 씻는 작세(爵洗)는 서쪽에 두며, 여러 집사의 관세도 그 동남쪽에 북향하여 설치한다.

14) 3각 전에 헌관 이하가 공복(公服)을 갖추고, 1각 전에 알자와 찬자가 먼저 배위(拜位)에 나아가 북향하여 사배(四拜)하고 나서 자리로 나아간다.

15) 알자가 헌관 이하를 인도하여 모두 자리로 나아가서 서게 하고, 찬자가 ‘사배하라’고 말하여, 헌관 이하가 모두 사배한다.

16) 축사(祝史)와 재랑이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서 관세하기를 마치고 각기 자리에 나아간다.

17) 재랑이 작세위(爵洗位)에 나아가 작을 씻어서 닦아 가지고, 받들어 준소(尊所)로 나아가서 점(坫) 위에 둔다.

18)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에 나아가서, 홀(笏)을 꽂은 뒤 손을 씻고 수건에 닦게 하되, 손을 씻고 수건에 닦는 것은 찬(贊)하지 않는다.

19) 홀을 잡으라는 찬(贊)에 따라 준소로 나아가서 서향하여 서게 한다.

20) 집준자(執尊者)가 보자기[羃]를 들고 술을 떠내면, 집사자가 작으로 술을 받는다.

21)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신위 앞으로 나아가 북향하여 서게 하고, 찬(贊)하여 꿇어앉아 홀을 꽂고 세 번 상향(上香)하게 한다.

22) 집사자가 작을 헌관에게 주면, 헌관이 작을 헌작(獻爵)하는데, 집사자에게 작을 주어 신위 앞에 올리게 한다.

23) 찬(贊)하여 홀을 잡고 부복했다가 일어나서 조금 물러나 북향하여 꿇어앉게 하고, 축(祝)이 신위의 오른쪽에 나아가서 동향하여 축문(祝文)을 읽는다.

24) 알자가 ‘부복하였다 일어나 몸을 바로 하라’고 찬하고, 인도하여 제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25) 대축(大祝)이 앞으로 나아가서 변과 두를 거두면, 찬자가 ‘사배하라’고 말하여, 헌관이 사배한다.

26)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나가고, 알자가 축 이하를 인도하여 배위(拜位)에 나아가서 서게 한다.

27) 찬자가 ‘사배하라’고 말하여, 축 이하가 모두 사배한다.

28) 알자가 인도하여 나가고, 알자와 찬자가 배위에 나아가서 사배하고 나간다.

29) 집사자가 찬(饌)을 거두면, 축이 구덩이에 묻는다(『세종실록』 23년 9월 14일).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교량제와 유사한 것이 조도(祖道)이다. 조도는 여행할 때 행로신(行路神)에게 제사지내는 일이다. 중국 고사에 황제(黃帝)의 아들 누조(累祖)가 여행을 좋아하여 행로(行路)에서 죽었는데, 후인(後人)이 행로신으로 모신 것에서 유래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