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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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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원개시 |
한글표제 | 경원개시 |
한자표제 | 慶源開市 |
상위어 | 개시(開市) |
관련어 | 공무역(公貿易), 변시무역(邊市貿易), 북관개시(北關開市), 교역인마정식(交易人馬定式), 감시어사(監市御使), 마시(馬市) |
분야 | 경제/무역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최주희 |
시행시기 | 1645년~1882년 |
시행장소 | 함경도 경원도호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원개시(慶源開市)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6년 2월 22일, 『효종실록』 5년 4월 10일, 『숙종실록』 45년 4월 2일, 『영조실록』 31년 4월 24일, 『영조실록』 45년 10월 6일 |
1645년 이후 청과의 교역을 위해 함경도 경원 지역에 2년마다 개설을 허가한 시장.
개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중심으로 부족을 통합하고 후금을 세움으로써 여진족[후금]과 명 사이에는 적대관계가 노골화되어 기존의 마시무역(馬市貿易)도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후금 입장에서는 농기와 농우 등을 얻을 새로운 교역 창구를 모색해야 했기에 병자호란 직후 조선에게 개시를 요구하고 나섰다. 조선에서는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평안도와 함경도 변경지역에 개시무역을 허가하였다. 이에 1645년(인조 23) 의주와 회령에 이어 경원 지역에 시장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경원개시는 2년에 한 번 열렸고, 열릴 때마다 20일간 지속되었으며, 개시 때마다 청과 조선의 관원이 감독관으로 파견되었다. 경원개시는 함경도에 위치한 회령개시와 함께 북관개시(北關開市)로도 불린다.
연원 및 변천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여진족과의 교역을 통해 북방의 정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한반도 북부에 거주하는 여진족들의 경제적 필요와 북방 이민족을 관리하려는 조선의 필요성이 맞물리면서 1406년(태종 6) 함경도 경원과 경성에 무역소가 설립되어 여진과 조선 사이에 호시무역(互市貿易)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호시는 상설화되지 못하였다.
명말 누르하치가 여진 사회를 통합하고 후금을 세우면서 명과 여진 사이에 행해지던 마시무역도 중단되었다. 이에 후금은 조선에 교역을 위한 시장을 열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조선으로서는 경제적 손실과 외교적 부담을 무릅쓰면서까지 호시를 설행할 수는 없었다. 정묘호란과 같은 물리적 충돌이 있은 후 호시를 열어달라는 후금의 요청이 계속되자 조선은 이를 수용하여 1628년(인조 6) 중강개시(의주개시)를 허가해주었다(『인조실록』 6년 2월 22일). 병자호란 후에는 함경도에도 개시를 허락하여, 영고탑(寧古塔) 사람들은 회령에서, 고이객(庫爾喀) 사람들은 경원에서 무역하도록 하였다.
1637년(인조 15) 호시 규정이 마련되고, 그 이듬해에 회령개시가 개설되었지만 경원개시는 1645년(인조 23)에야 비로소 개설되었다. 초기에는 암구뢰달호(巖丘賴達湖)의 만주족이 참가하다가 1654년(효종 5) 이후 고이객 사람, 즉 야춘인(也春人)이 혼춘(琿春) 사람들과 함께 혼춘기관(琿春旗官)의 영솔하에 경원개시에 참가하였다. 혼춘 사람들이 경원개시에 참여하면서 거래 규모는 이전보다 커졌으나 흉년 등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장이 개설됨으로써 조선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에 직면하기도 하였다(『효종실록』 5년 4월 10일).
혼춘 지역은 청의 가장 동쪽에 속하는 변방이었는데, 무역을 통해 농기구나 농우, 식량을 공급받는 편이 본국을 통하는 것보다 더욱 유리하였다. 또 회령보다는 경원이 지리적으로 더 가까웠기 때문에 경원개시는 혼춘 지역에 물자를 공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때문에 1882년(고종 19)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채결되기까지 경원개시는 계속 유지되었다.
개시무역은 국가 간에 수평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역이라기보다 청에 대한 의례적 성격이 강한 무역 형태였다. 경원개시를 감독하기 위해 파견된 청의 관리들에게 조선 측에서는 번번이 접대를 하고 예단(禮單)을 지급해야 했다. 또 경원·회령개시의 경우 장소가 국경 안이고, 개시 참여의 인원과 교역물종이 정해지지 않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계속 증가하였기 때문에 개시를 담당하는 함경도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660년(현종 1) 청과의 협의 끝에 「교역인마정식(交易人馬定式)」을 정하였지만 경원은 혼춘과 가깝다는 이유로 정식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경원개시에 대한 폐단은 계속되었다. 실제로 개시 참가인 수가 늘고 개시 감독을 위해 조선에 왔던 청 관리들의 침학이 심해졌다(『숙종실록』 45년 4월 2일).
18세기 들어 경원개시의 폐단이 극에 이르자 경원개시의 장소를 국경 밖으로 옮기거나, 경원개시를 아예 폐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영조실록』 31년 4월 24일). 이에 영조는 개시의 폐단을 조사할 것을 명하였다. 조사를 바탕으로 1769년(영조 45)에 『함경도회원개시정례(咸鏡道會源開市定例)』를 완성하여 청 관리에 대한 접대비용을 정하고, 이들에게 주는 예단의 규모를 규정하여 함경도의 부담을 최소화하였다. 그러나 청 관리가 데려오는 수종 인원이 계속 늘어나 다시 폐단이 야기되자 1851년(철종 2)에는 『함경도회원개시정례』를 개정하여 수종 인원의 수도 규정하였다. 이는 1882년 개시가 철파될 때까지 계속 지켜졌다.
절차 및 내용
경원개시의 과정은 회령개시와 기본적으로 비슷했다. 경원개시는 2년에 한 번 열렸는데, 회령개시를 마친 후 영고탑과 오라(烏喇)의 관원을 제외한 북경통관(北京通官) 2명과 성경필첩식(盛京筆帖式) 1명만 종성과 온성을 거쳐 경원으로 가서 개시 업무를 관장했다. 경원으로 가는 도중 종성에는 회령개시에서 무역한 물건을 맡겨두었다. 경원에 이들이 도착하면 환영한다는 뜻으로 하마연(下馬宴)을 베풀고, 개시의 설행을 선포하며, 청 측에서 금물(禁物)을 확인하고 교역의 폐단을 막을 것을 다짐하는 방문을 낭독하였다. 교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측에서는 식량과 예단을 제공하였으며, 교역을 마친 후에는 떠나는 것을 기념하여 상마연(上馬宴)을 설행하고 조선 측에서 귀환하는 데 필요한 식량과 말을 제공하였다. 조선에서는 감시어사(監市御使)를 파견하여 개시를 감독했는데 때때로 북평사(北評事)가 이를 겸하다가 1769년(영조 45)부터 이것이 정식이 되었다(『영조실록』 45년 10월 6일).
하마연이 있은 다음 날에는 물종을 정해진 수량만큼 교환하는 공시(公市)가 개설되었다. 경원개시에서는 소, 솥, 쟁기, 가래 등이 주된 거래품이 되었다. 특히 농우에 대한 청의 수요가 많았는데, 공시의 거래물품들은 주로 팔기군병의 생계 보조를 위한 것이었기에 아주 저렴한 값으로 제공되었다. 공시가 끝나면 사시(私市)가 열렸는데 여기서는 금지된 물품 외에는 자유로운 거래가 용인되었다. 본래 청은 사시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청과 조선 양측 상인의 요구로 조선 측에서 3일간 사시를 여는 것을 공식화하였다. 공시와는 달리 사시에서는 조선 측의 이득이 다소 높았다. 사시가 끝나면 마시(馬市)가 개설되는데, 이 역시 사무역으로 청에서는 원칙상 금하였으나 북경통관이 병을 핑계하고 간섭하지 않는 등으로 해서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마시에서는 청국의 말과 조선의 농우, 짐 싣는 데 쓰이는 북마(北馬) 등을 교역하였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함경도회원개시정례(咸鏡道會源開市定例)』
- 『통문관지(通文館志)』
- 고승희, 「18~19세기 北關開市의 운영과 성격」, 『한국사연구』109, 한국사연구회, 2000.
- 고승희, 「조선 후기 北關開市 연구」, 『조선시대사학보』1, 조선시대사학회, 1997.
- 전해종, 「中世 韓中 貿易形態 小考 : 特히 公認貿易과 密貿易에 대하여」, 『대구사학』12·13, 대구사학회, 1979.
- 朱相吉·劉喜濤, 「초기 北關開市와 也春人문제」, 『민족학연구』8, 한국민족학회, 2009.
- 최근묵, 「朝淸貿易小考: 17世紀 開市를 中心으로」, 『충남대학교논문집』6,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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