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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1:5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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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노걸대 |
한글표제 | 노걸대 |
한자표제 | 老乞大 |
상위어 | 잡학(雜學), 역학(譯學), 한학(漢學) |
관련어 | 『박통사(朴通事)』 |
분야 | 정치/인사/선발 |
유형 | 문헌 |
집필자 | 정광 |
저편자 | 미상 |
간행처 | |
간행년일 | 미상 |
권책수 | 1권 1책 |
사용활자 | 목판본 |
표제 | 老乞大 |
소장처 | 개인 소장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노걸대(老乞大) |
조선시대 사역원에서 중국어 교육에 사용한 한어의 초급 교재.
개설
『노걸대(老乞大)』는 중국의 원(元)대에 새로운 공용어로 등장한 한아언어(漢兒言語, 이하 한어로 약칭)를 학습하기 위하여 고려 역관들이 편찬한 회화 교과서였다. 서명의 ‘노(老, Lao)’는 한어에서 경칭으로 붙는 것이며 ‘걸대(乞大)’는 ‘Kitai’를 표기한 것으로 북방 민족들이 중국을 일컫는 말이었다. 영어에서 중국을 ‘Cathay’라고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노걸대’는 ‘중국인씨, 중국통’이이라는 의미이다. 고려말에 중국을 여행한 고려 역관들이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전하는 것은 조선 태종(太宗)대 판본으로 간행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원본인 듯하다. 원본은 후대에 중국에서 공용어의 변천에 따라 여러 차례 수정되었다. 『노걸대』는 비교적 쉽고 짧은 대화로 이루어져 한어 교육의 초급 교재로 간주된다. 반면에 같은 한어 교재인 『박통사』는 중급 이상의 교재로 본다.
편찬/발간 경위
정확한 편찬 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 책과 자매편인 『박통사』의 내용에 1346년(원 혜종 14)에 원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원나라를 여행한 고려 역관들이 저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고려의 통문관(通文館) 또는 후대의 사역원(司譯院)에서 한어 교재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계속 쓰였으며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사역원을 폐지할 때까지 여러 차례 수정을 거듭하였다.
현전하는 원본 『노걸대』는 조선 태종대 간행된 판본으로 보이며, 이것은 1483년(성종 14)에 사행(使行)을 수행하여 조선에 온 명(明)나라 사람 갈귀(葛貴)에 의하여 필요 없는 부분은 잘라 내고 말이 변한 곳은 고치는 대대적인 산개(刪改)를 거쳤다. 이 산개 『노걸대』는 중종대에 최세진(崔世珍)에 의하여 정음(正音)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 번역이라는 말은 뜻을 풀이하기보다 한자음의 중국 표준음을 정음, 즉 한글로 표기한 것을 뜻하였다.
이 ‘산개본(刪改本)’은 300여 년간 한어 교재로 사용되다가 1761년(영조 37)에 변헌(邊憲) 등이 청(淸)나라 북경의 만다린으로 수정하여 『노걸대신석(老乞大新釋)』이라는 서명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신석본(新釋本)’은 지나치게 구어를 반영하였다고 하여 1795년(정조 19)에 이수(李洙) 등이 다시 개정하고 『중간노걸대(重刊老乞大)』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중종대에 최세진이 ‘산개본’을 번역한 이후에 그가 번역한 판본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없어져서 사역원에서 이를 다시 언해하였다. 즉, 1670년(현종 11)에 사역원의 한어 역관들이 ‘산개본’을 언해하여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라는 이름으로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하였고, 1745년(영조 21)에 다시 한 번 이를 수정하였다.
1763년(영조 29)에는 『노걸대신석』을 언해하여 『신석노걸대언해(新釋老乞大諺解)』가 간행하였고, 1795년(정조 19)에 『중간노걸대』를 편찬하면서 바로 이를 언해하여 『중간노걸대언해(重刊老乞大諺解)』를 간행하였다. 따라서 노걸대라는 이름의 한어 교재로는 한어본으로 ‘원본’을 비롯하여 ‘산개본’·‘신석본’·‘중간본’이 있고, 한글이 발명된 다음에 ‘산개본’ 이후의 것은 모두 우리말로 풀이하고 정음으로 발음을 달아서 번역한 『노걸대』·『노걸대언해』·『신석노걸대언해』·『중간노걸대언해』 등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노걸대』는 조선후기에 만주어와 몽골어로 번역되어 『청어노걸대(淸語老乞大)』·『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이 두 책은 병자호란 때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이 쇄환되어 돌아와서 한어 교재인 『노걸대』를 번역한 것이었다. 즉, 같은 내용을 만주어와 몽골어의 교재로 한 것이었다. 『속대전(續大典)』부터는 이 만주어와 몽골어의 『노걸대』가 역과(譯科) 시험의 출제서로 등재되었다.
서지 사항
원본 『노걸대』는 목판본으로 크기가 31.0×18.8㎝이며 사주쌍변(四周雙邊)에 반엽광곽(半葉匡郭)이 25.1×15.5㎝였다. 유계(有界)에 10행으로 되었고, 1행에 21자를 기입하였다. 판심(版心)은 상하 대흑구(大黑口) 상하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로 되었으며 표제(表題)는 ‘노걸대’였다. 모두 40엽에 79쪽으로 첫째 엽의 하단이 일부 훼손되었으나 대부분의 글자를 읽을 수 있다.
구성/내용
『노걸대』는 원대 이후에 새로 등장한 중국어, 즉 한어의 학습에서 회화 강독 교재로 사용되었다.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중국어의 대화를 여정(旅程)에 따라 장면별로 배열하였는데, 고려 상인들이 중국을 여행하면서 부딪친 여러 장면에서 실제로 사용한 회화를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즉, 『노걸대』는 중국을 여행한 고려 상인들과 동행한 중국 상인 왕(王)씨가 현지에서 주고받은 대화가 중심이었다. 따라서 중국을 여행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장면을 차례로 설정하고 그때에 이루어진 대화를 보여 주어 실제로 유사한 상황에서 중국인과 만났을 때에 필요한 실용 회화를 익히도록 한 것이었다.
『노걸대』의 내용을 보면 고려 상인들이 고려를 출발하여 요동(遼東)을 거쳐 지금의 북경(北京)인 대도(大都)까지 여행하면서 일어난 일들이 화화체로 쓰여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고려 상인 이씨(李氏)가 친척 두 사람과 함께 중국으로 장사를 떠나는데 중로에서 중국인 왕씨를 만나서 같이 여행하는 내용을 상황에 따라 여섯 장면으로 나누었다. 제1장면은 주인공 이씨와 그 일행이 요양성(遼陽城)에 사는 중국인 객상(客商) 왕씨를 만나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함께 길을 떠나는 장면이었다. 제2장면은 중간 기착지인 와점(瓦店)까지 가는 이야기이며, 제3장면은 이후에 민박을 하면서 하점(夏店)까지, 그리고 대도(大都)에 도착하는 이야기를 묶었다.
제4장면은 북경에 도착하여 여관을 잡고 먼저 북경에 와 있는 친척을 방문하여 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북경에서의 생활을 묘사하였다. 특히 중국인 왕씨를 중심으로 그가 친척을 모아 연회를 하고 술을 너무 마셔 병이 난 일, 활쏘기 시합 등 그와 함께 북경의 여러 생활을 대화로 엮었다. 왕씨는 고려 상인들이 가져온 물건의 값을 알아보는 동안 탁주(涿州)에 가서 장사를 더 하기 위하여 물건을 사고, 그가 돌아온 다음에 돌아갈 때 필요한 물건을 사기로 하였다. 이 부분이 『노걸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제5장면은 어떤 방탕아를 예로 하여 그가 어떻게 가산을 탕진하고 패가(敗家)의 길을 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도리가 무엇이며, 올바르게 사는 길은 무엇인지를 교훈적으로 말하였다. 따라서 이 단원은 여행을 하거나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노걸대』의 전체 내용과는 매우 이질적이었다.『노걸대』가 지나치게 상고(商賈)의 상스러운 말만 배운다는 비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이 단원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방탕아의 옷차림을 통하여 당시 유행하던 옷·모자·띠·신발·음식 등의 전문 어휘를 배울 수 있고, 그가 먹는 음식을 통하여 당시에 인기 있는 먹거리도 알 수 있었다. 『노걸대』가 한어 교과서임을 다시 깨우쳐 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제6장면은 고려 상인들이 탁주에서 돌아온 왕씨의 도움으로 가져온 물건을 팔고 고려로 돌아가서 팔 물건을 사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돌아갈 길일(吉日)을 점치고 왕씨와 헤어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각 장면은 다시 여러 주제의 대화로 나누어졌다. 『노걸대』의 원본은 『박통사』보다 1화가 많은 모두 107화로 나누어 각 장면의 주제를 설정하고 그에 해당하는 대화를 교재로 하였다. ‘산개본’에서도 이러한 장면의 분석은 동일하였다. 그러나 ‘신석본’과 ‘중간본’에서는 내용이 많은 몇 화를 더 나누어 모두 111화로 늘렸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의 분석은 앞서 말한 것처럼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교사들이나 소지자에 의하여 꺽쇠를 가필하는 형식으로 수행되었다.
이러한 가필을 보이는 것으로는 산기(山氣)문고 소장의 가정본(嘉靖本) 『노걸대』가 현존하는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왜란과 호란 이후에 교서관에서 간행한 ‘언해본’에서는 처음부터 판본에 장면을 107화로 나누어 표시하였다. 따라서 이 자료를 통하여 당시 원나라대도(大都)의 생활상이라든지 북경으로 가는 당시의 여행길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참고문헌
- 정광, 『역학서 연구』, J&C, 2002.
- 정광, 『역주 원본노걸대』, 박문사, 2010.
- 小倉進平, 『朝鮮語學史』, 東京: 刀江書院, 1940.
- 정광, 「<노박집람>과 <노걸대>·<박통사>의 구본」, 『진단학보』 89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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