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양문(경복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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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4일 (수) 22:06 기준 최신판



경복궁 수정전의 외행각에 있던 문.

개설

경복궁의 수정전은 1867년(고종 4)에 옛 집현전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전각이다. 고종대에 간행된 『은대조례』에 따르면 수정전은 편전으로도 쓰였다. 숭양문(崇陽門)은 이 수정전의 외행각에 있던 문이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의 숭양문은 삼문으로 조성된 규모가 장대한 문으로 수정전 영역의 정문 역할을 하였다. 수정전은 경복궁의 남서쪽에 비교적 큰 영역을 차지하였는데 그 주변에는 옥당, 내각, 정원, 내반원, 대전장방, 빈청, 약방, 의약청, 선전관청, 검서청, 장무관직소 등의 궐내 각사가 들어차 있었다. 수정전은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며 전각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전각이었다. 궁궐 내 여타의 건물과 달리 전면에 3개의 마당을 3중의 행각이 둘러싸는데 외행각, 중행각, 수정전을 직접 두른 내행각으로 이루어졌다. 숭양문은 그중 가장 바깥 영역인 외행각의 문인데, 외동행각에 연명문(延明門)이 있고, 중행각에 영화문(永化門)이 있고, 그 북쪽에 수정전 내행각에 수정문이 축선 상에 차례로 놓였다. 숭양문은 수정전 영역의 가장 전면에 삼문을 갖추고 서서 위용을 자랑하였다.

경희궁에도 같은 이름의 문이 있었다. 경복궁과 경희궁의 숭양문은 모두 편전에 속하였다. 왕은 남쪽을 바라본다, 즉 ‘남면’한다는 상징과 ‘숭양(崇陽)’이 서로 통하는 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의 숭양문은 1867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함께 조성하였으나, 1895년(고종 32)에 수정전이 군국기무처로 변하면서 중행각과 외행각에 변화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수정전 행각의 영역이 모두 훼철되었으나 아직 복원되지 못하였다.

형태

경복궁의 숭양문은 수정전 외행각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솟을삼문으로 들어서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76년(고종 13) 6월 12일에 일본의 이사관인 외무대승미야모토 쇼이치가 왕을 접견하려고 경복궁에 들어오자 왕이 숭양문 밖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고종실록』 13년 6월 12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은대조례(銀臺條例)』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