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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4일 (수) 22:04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평안도 정주에 위치했던 역.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신안역(新安驛)은 정주목의 읍치에 위치한 역(驛)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에서 평안도에 위치한 역들을 ‘관(館)’이라고도 호칭했던 까닭에, 사료상에는 신안관(新安館)으로도 다수 기록되어 있다.

신안역은 고려시대에는 흥화도(興化道) 소속으로 곽주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신안역을 포함하여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 평안도 지역에 위치한 곳들은 모두 대동도(大同道)의 소속 역으로 편성되었다.

내용 및 변천

신안역은 조선시대 평안도 정주에 위치했던 유일한 역이다. 고려시대에는 흥화도(興化道) 소속으로 곽주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려후기 이후 몇 차례의 군현 개편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신안역이 정주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시대의 신안역은 고려시대의 신안역으로부터 위치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평안도 지역의 역도(驛道) 편성은 몇 차례의 변동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한양과 의주를 잇는 교통로상의 역 중 평안도 지역에 위치한 13곳의 역관(驛館)들은 모두 평안도관로찰방(平安道館路察訪)의 관할하에 있었다. 신안역 역시 평안도관로찰방 관할하의 13곳 역관(驛館) 중 하나였다(『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평안도관로찰방은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후 신안역은 조선말까지 대동도 소속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1462년(세조 8) 전국적인 역도제(驛道制)의 개편 때에도 평안도 지역은 역도 편성에 변화가 없었으며, 이후에 간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모두 신안역은 대동도의 소속 역으로 기록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신안역에는 역노(驛奴) 73명, 역비(驛婢) 56명, 역마(驛馬) 16마리가 배속되어 있었다.

신안역은 서쪽으로는 곽산·선천 방면, 동쪽으로는 가산·안주 방면을 연결하는 평양~의주간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 신안역에서는 서쪽으로 곽산 운흥역(雲興驛), 동쪽으로 가산 가평역(嘉平驛)과 연결되었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신안역도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신안역의 위치는 현재 북한의 행정 구역으로 평안북도 정주시 성남동에 해당한다. 한편 고려시대의 신안역은 조선시대 신안역보다 동쪽에 위치한 현 정주시 신안리 지역으로 비정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정요근, 「조선초기 驛路網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공편, 『조선향토대백과사전』, 평화문제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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