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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4일 (수) 22:04 기준 최신판



경덕궁에 있던 효종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달랐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경모전은 조선의 제17대 왕인 효종의 혼전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59년(효종 10)에 효종이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경모(敬慕)’로 정하고(『효종실록』 10년 5월 9일), 6개월 뒤 영릉(寧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10실에 부묘할 때까지 경모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659년 5월 4일 효종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자 창덕궁의 선정전(宣政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6개월 뒤 10월에 영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현종실록』 즉위년 10월 29일)(『현종개수실록』 즉위년 10월 29일). 이때 창경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경모전이다.

효종의 혼전은 처음에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에 설치하였다. 혼전에서 졸곡제(卒哭祭)를 지낸 뒤 후원(後苑)에 천둥이 치고 궁중에 귀변(鬼變)이 발생하여 현종이 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혼전을 계상당(啓祥堂)으로 옮겼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12월 1일). 계상당이 효종의 혼전으로 최종 정해졌으며, 이때 전랑(前廊)을 조성하였다. 문정전에서 계상당으로 혼전의 전각은 바뀌었으나 혼전명은 그대로 경모전이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모전이 창덕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경모전은 효종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경모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일반적으로 혼전에서 거행하는 의식과 같은 절차를 밟았다. 경모전에 반우한 날 지낸 초우제(初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를 거쳐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거행하였다. 그 밖에 조석상식(朝夕上食), 사시(四時) 및 납(臘) 제사, 속절(俗節) 및 삭망(朔望) 제사를 경모전에서 지냈다. 사시는 춘·하·추·동, 납일은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 속절은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 삭망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한다. 또 경모전에서 주다례(晝茶禮)를 거행하였다.

혼전에서 거행한 의식 중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에서 내린 제사와 시호를 받고 분황(焚黃)하는 의식을 행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조대에는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중원의 주인이 바뀌면서 청나라에서 조선왕실의 국상에 사신을 파견하여 혼전에서 ‘조제(弔祭)’를 거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효종의 국상에서도 혼전에서 ‘조제’하였다.

1661년(현종 2) 7월 8일 효종의 신주를 경모전에서 옮겨 태묘(太廟)에 부묘하였다. 『춘관통고(春官通考)』에 효종의 부묘 날짜를 두고 『국조보감(國朝寶鑑)』의 기록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효종이 돌아가신 날짜와 담제를 지낸 시기를 고려하여 7월 8일에 부묘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종개수실록』과 『종묘의궤(宗廟儀軌)』에도 7월 8일에 부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종실록』에는 7월 7일에 부묘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날은 경모전에서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한 날이었다. 고동가제를 행한 다음 날에 부묘례를 거행한다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기사를 고려하면 7월 8일에 부묘하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경모전은 효종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659년(현종 즉위) 10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는 창경궁의 문정전에, 1659년 12월 1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661년 7월 8일까지는 경덕궁의 계상당에 설치되었다.

변천

경녕전이었던 경덕궁의 전각은 고종대까지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효종국장도감의궤(孝宗國葬都監儀軌)』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종묘의궤(宗廟儀軌)』
  • 『통문관지(通文館志)』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