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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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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금강암 |
한글표제 | 금강암 |
한자표제 | 金剛庵 |
상위어 | 불교(佛敎), 사찰(寺刹) |
관련어 |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 고령사(高嶺寺), 보광사(普光寺)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금강암(金剛庵)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9년 7월 3일, 『명종실록』 즉위년 10월 5일 |
조선시대에 있었던 파주보광사의 산내 암자.
개설
금강암(金剛庵)은 조선시대 고령사(高嶺寺)의 산내 암자였다. 고령사는 지금의 파주보광사인데, 금강암의 터가 어디인지는 불분명하다.
내용 및 특징
보광사(普光寺)는 조선시대에 고령사(高嶺寺)로 불렸는데, 고령사와 관련해서는 1409년에 산사태가 일어나 고령사 아랫마을 주민 22인이 압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태종실록』 9년 7월 3일).
그리고 1545년 을사사화 때 희생된 계림군(桂林君)이유(李瑠)가 고령사에 잠시 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유는 명종의 즉위와 관련하여 벌어진 윤임(尹任) 일파와 윤원형(尹元衡) 일파 사이에 벌어진 정쟁에서 윤임이 제거되자 자신에게 해가 닥칠 것을 예감하고 피신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령사 금강암에 머물고 있던 승노(僧奴) 경원(敬元)을 만나 함경도 안변으로 갔으나 체포되었고, 결국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명종실록』 즉위년 10월 5일).
그 외에 금강암과 관련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보광사 산내 암자로 도솔암과 영묘암이 있지만 금강암과의 관련성은 불분명하다.
참고문헌
- 황인규, 「파주 보광사의 역사와 위상」, 『대각사상』12, 200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