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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0일 (수) 00:17 기준 최신판




총론

[1768년(영조 44)~1801년(순조 1) = 34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사망자. 세례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거주지는 전라북도 전주이다. 아버지는 유동근(柳東根)이고, 어머니는 유씨(兪氏)이다. 호남지역 천주교의 사도로 불리는 유항검(柳恒儉)의 동생이기도 하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1768년(영조 44)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에서 태어난 유관검(柳觀儉)은 1790년(정조 14) 과거를 보러 상경하던 중 청주에서 민도라는 사람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서를 얻어 본 후 이종사촌인 윤지충(尹持忠)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했다고 전한다.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에서 어머니의 제사를 폐한 것이 문제가 되어 발생한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윤지충이 체포돼 순교했을 때 유관검도 체포됐으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영입하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1795년(정조 19)에 한동안 유관검의 집에서 살았으며, 그해 8월 유관검은 주문모 신부를 밀사 황심(黃沁)에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796년(정조 20) 주문모 신부가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서양의 큰 배를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北京) 주교에게 보낼 때 유관검은 형 유항검 등과 함께 400냥의 돈을 모아 보냈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

1801년(순조 1) 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에 대한 금압령을 내리면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월 10일) 유관검은 그해 3월 전라 감영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다시 배교를 하고 아는 신자들의 이름과 행적을 실토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 또한 “서양 군함의 힘을 빌어 조정에 무력 행사를 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이 드러나 형 유항검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순조실록』 1년 4월 25일) 이후 형조를 거쳐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은 유관검은 결국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 판결을 받고 전주로 압송되어 그해 9월 17일 전주 풍남문 밖에서 처형되었다.(『순조실록』 1년 9월 11일),[『승정원일기』순조 1년 9월 12일] 당시 그의 나이 34세였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사학징의(邪學懲義)』
  • 『벽위편(闢衛編)』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9,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