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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대표표제=정빈민씨|한글표제=정빈민씨|한자표제=靜嬪閔氏|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왕족/후궁|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명종~인조|집필자=홍연주|자=|호=|봉작=정빈(靜嬪)|시호=|출신=왕족|성별=여자|출생=1567년(명종 22) 9월 29일(음)|사망=1626년(인조 4) 11월 2일(음)|본관=여흥(驪興)|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산31-2|증조부=민자방(閔子芳)|조부=민희열(閔希說)|부=민사준(閔士俊)|모_외조=신창 맹씨(新昌 孟氏) : 맹익선(孟益善)의 딸|형제=|처_장인=(남편)선조(宣祖) →(자녀)2남 3녀|자녀=(1남)인성군(仁城君)이공(李珙) (2남)인흥군(仁興君)이영(李瑛) (1녀)정인옹주(貞仁翁主) (2녀)정선옹주(貞善翁主) (3녀)정근옹주(貞謹翁主)|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384|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na_11305026_001 『선조실록』 13년 5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1305026_002 『선조실록』 13년 5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1305027_001 『선조실록』 13년 5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411001_002 『인조실록』 4년 11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03009_003 『선조실록』 36년 3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28_008 『인조실록』 2년 1월 28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02_002 『인조실록』 2년 2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11016_001 『인조실록』 2년 11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11017_003 『인조실록』 2년 11월 17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2025_001 『인조실록』 3년 2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11015_001 『인조실록』 3년 11월 15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01021_002 『인조실록』 6년 1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05014_001 『인조실록』 6년 5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05021_003 『광해군일기』 3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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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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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빈의 무덤은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산31-2에 위치해있고, 1986년 의정부시 향토유적 5호로 지정되었다. 묘비는 1679년(숙종 5)에 세워졌다.
 
민정빈의 무덤은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산31-2에 위치해있고, 1986년 의정부시 향토유적 5호로 지정되었다. 묘비는 1679년(숙종 5)에 세워졌다.
  
민정빈은 선조와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었다. 1남은 인성군이공(李珙)으로 형조 판서윤승길(尹承吉)의 딸과 혼인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03009_003 『선조실록』 36년 3월 9일])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인조가 숙부의 예로써 인성군을 대하였다. 그런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발생하였고, 이 일로 잡혀온 사람들이 문초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인성군을 연루자로 언급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28_008 『인조실록』 2년 1월 28일]),([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02_002 『인조실록』 2년 2월 2일]) 이로 인해 대신들은 인성군에 대한 위리안치(圍籬安置)를 건의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11016_001 『인조실록』 2년 11월 16일]) 인조는 이에 대해 인성군이 이괄의 난이 일어나 자신이 대피하던 처음부터 호종(扈從)하며 잠시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난을 모의할 수 없었다고 대응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11017_003 『인조실록』 2년 11월 17일]) 그러나 대신들의 청이 끊이지 않는 바람에 이듬해인 1625년(인조 3) 2월 인성군을 강원도 간성(杆城)에 위리안치 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2025_001 『인조실록』 3년 2월 25일]) 이후 인성군은 원주로 옮겨졌다가([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11015_001 『인조실록』 3년 11월 15일]) 1626년(인조 4) 어머니 민정빈의 병이 위독한 것을 계기로 유배에서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628년(인조 6) 유효립(柳孝立) 등의 대북파(對北派) 세력이 규합하여 광해군(光海君)을 상왕(上王)으로 삼고 인성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한 것이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인성군은 다시 진도로 유배를 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01021_002 『인조실록』 6년 1월 21일]) 이후 인성군을 사형에 처하라는 대신들의 요청으로 인조는 그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인성군은 이에 따라 자결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05014_001 『인조실록』 6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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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빈은 선조와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었다. 1남은 인성군이공(李珙)으로 형조 판서윤승길(尹承吉)의 딸과 혼인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03009_003 『선조실록』 36년 3월 9일])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인조가 숙부의 예로써 인성군을 대하였다. 그런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발생하였고, 이 일로 잡혀온 사람들이 문초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인성군을 연루자로 언급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28_008 『인조실록』 2년 1월 28일]),([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02_002 『인조실록』 2년 2월 2일]) 이로 인해 대신들은 인성군에 대한 위리안치(圍籬安置)를 건의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11016_001 『인조실록』 2년 11월 16일]) 인조는 이에 대해 인성군이 이괄의 난이 일어나 자신이 대피하던 처음부터 호종(扈從)하며 잠시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난을 모의할 수 없었다고 대응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11017_003 『인조실록』 2년 11월 17일]) 그러나 대신들의 청이 끊이지 않는 바람에 이듬해인 1625년(인조 3) 2월 인성군을 강원도 간성(杆城)에 위리안치 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2025_001 『인조실록』 3년 2월 25일]) 이후 인성군은 원주로 옮겨졌다가([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11015_001 『인조실록』 3년 11월 15일]) 1626년(인조 4) 어머니 민정빈의 병이 위독한 것을 계기로 유배에서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628년(인조 6) 유효립(柳孝立) 등의 대북파(對北派) 세력이 규합하여 광해군(光海君)을 상왕(上王)으로 삼고 인성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한 것이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인성군은 다시 진도로 유배를 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01021_002 『인조실록』 6년 1월 21일]) 이후 인성군을 사형에 처하라는 대신들의 요청으로 인조는 그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인성군은 이에 따라 자결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05014_001 『인조실록』 6년 5월 14일])
  
2남은 인흥군(仁興君)이영(李瑛)으로 좌찬성(左贊成)송희업(宋熙業)의 딸과 혼인하였다. 1녀는 정인옹주(貞仁翁主)로 당원위(唐原尉)홍우경(洪友敬)과 혼인하였고, 2녀는 정선옹주(貞善翁主)로 길성군(吉城君)권대임(權大任)과 혼인하였으며, 3녀는 정근옹주(貞謹翁主)로 일선위(一善尉)김극빈(金克鑌)과 혼인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05021_003 『광해군일기』 3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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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남은 인흥군(仁興君)이영(李瑛)으로 좌찬성(左贊成)송희업(宋熙業)의 딸과 혼인하였다. 1녀는 정인옹주(貞仁翁主)로 당원위(唐原尉)홍우경(洪友敬)과 혼인하였고, 2녀는 정선옹주(貞善翁主)로 길성군(吉城君)권대임(權大任)과 혼인하였으며, 3녀는 정근옹주(貞謹翁主)로 일선위(一善尉)김극빈(金克鑌)과 혼인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05021_003 『광해군일기』 3년 5월 21일])
  
 
=='''참고문헌'''==       
 
=='''참고문헌'''==       

2018년 1월 9일 (화) 23:00 기준 최신판




총론

[1567년(명종 22)~1626년(인조 4) = 60세].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宣祖)의 후궁.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강화도호부사(江華都護府使)를 지낸 민사준(閔士俊)이고, 어머니 신창 맹씨(新昌孟氏)는 사섬시(司贍寺) 첨정(僉正)을 지낸 맹익선(孟益善)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으로 추증된 민희열(閔希說)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성종(成宗)의 사위인 여천위(驪川尉)민자방(閔子芳)이다.

선조의 후궁

민정빈(閔靜嬪)은 1580년(선조 13) 선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의 첩지를 받고 입궐하여 수진방(水眞坊)에 있는 궁에서 머물게 되었다.(『선조실록』 13년 5월 26일),(『선조실록』 13년 5월 26일) 이때 그녀가 성종의 사위인 민자방의 손녀라 선왕의 외손을 후궁으로 선발할 수는 없다는 간원의 상소가 있었으나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선조실록』 13년 5월 27일) 이후 그녀는 소의(昭儀)와 귀인(貴人)을 거쳐 정1품 빈(嬪)까지 올랐다.[『기언(記言)』 권19 구묘(丘墓)3 「정빈여흥민씨묘지」]

민정빈은 선조를 모시는 동안 친족에 대한 벼슬을 요청한 적이 없고, 선조와 중전을 대할 때 항상 예를 갖추었다. 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거치며 선조와 함께 의주까지 파천을 가 어려움을 겪었으며, 선조가 죽자 사가로 나와 지내며 19년간 고질병을 앓았는데 인목대비(仁穆大妃)가 매번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기언』 권19 구묘 3「정빈여흥민씨묘지」]

인조(仁祖) 대에 큰아들이었던 인성군(仁城君)이 역모에 연루되어 원주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민정빈의 병세가 깊어지자 인조는 인성군을 석방하여 어머니 민정빈 곁을 지키도록 명하였다.(『인조실록』 4년 11월 1일) 그러나 인성군이 도착하기 전 민정빈은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기언』권19 구묘 3「정빈여흥민씨묘지」] 민정빈이 사망하자 인조는 장례에 관련한 것들을 법전대로 시행하도록 지시하였다.[『응천일록(凝川日錄)』권3 병인년 11월 2일]

묘소와 후손

민정빈의 무덤은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산31-2에 위치해있고, 1986년 의정부시 향토유적 5호로 지정되었다. 묘비는 1679년(숙종 5)에 세워졌다.

민정빈은 선조와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었다. 1남은 인성군이공(李珙)으로 형조 판서윤승길(尹承吉)의 딸과 혼인하였다.(『선조실록』 36년 3월 9일)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인조가 숙부의 예로써 인성군을 대하였다. 그런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발생하였고, 이 일로 잡혀온 사람들이 문초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인성군을 연루자로 언급하였다.(『인조실록』 2년 1월 28일),(『인조실록』 2년 2월 2일) 이로 인해 대신들은 인성군에 대한 위리안치(圍籬安置)를 건의하였다.(『인조실록』 2년 11월 16일) 인조는 이에 대해 인성군이 이괄의 난이 일어나 자신이 대피하던 처음부터 호종(扈從)하며 잠시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난을 모의할 수 없었다고 대응하였다.(『인조실록』 2년 11월 17일) 그러나 대신들의 청이 끊이지 않는 바람에 이듬해인 1625년(인조 3) 2월 인성군을 강원도 간성(杆城)에 위리안치 시켰다.(『인조실록』 3년 2월 25일) 이후 인성군은 원주로 옮겨졌다가(『인조실록』 3년 11월 15일) 1626년(인조 4) 어머니 민정빈의 병이 위독한 것을 계기로 유배에서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628년(인조 6) 유효립(柳孝立) 등의 대북파(對北派) 세력이 규합하여 광해군(光海君)을 상왕(上王)으로 삼고 인성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한 것이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인성군은 다시 진도로 유배를 갔다.(『인조실록』 6년 1월 21일) 이후 인성군을 사형에 처하라는 대신들의 요청으로 인조는 그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인성군은 이에 따라 자결하였다.(『인조실록』 6년 5월 14일)

2남은 인흥군(仁興君)이영(李瑛)으로 좌찬성(左贊成)송희업(宋熙業)의 딸과 혼인하였다. 1녀는 정인옹주(貞仁翁主)로 당원위(唐原尉)홍우경(洪友敬)과 혼인하였고, 2녀는 정선옹주(貞善翁主)로 길성군(吉城君)권대임(權大任)과 혼인하였으며, 3녀는 정근옹주(貞謹翁主)로 일선위(一善尉)김극빈(金克鑌)과 혼인하였다.(『광해군일기』 3년 5월 21일)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整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기언(記言)』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포저집(浦渚集)』
  • 이미선, 「조선시대 후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지두환, 『선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