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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5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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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민서 |
한글표제 | 이민서 |
한자표제 | 李敏敍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효종~숙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이중(彛仲) |
호 | 서하(西河) |
시호 | 문간(文簡)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33년(인조 11) 1월 2일 |
사망 | 1688년(숙종 14) 2월 2일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경기 교하(交河) |
묘소소재지 | 경기 교하(交河) 북쪽 10리 탄포(炭浦)의 언덕 |
증조부 | 이극강(李克綱) |
조부 | (양증조)이성록(李成祿) (생증조)이수록(李綏祿) |
부 | (양부)이후여(李厚輿) (생부)이경여(李敬輿) |
모_외조 | (양모)무안박씨(務安博氏); 박인(朴璘)의 딸 (생모)풍천임씨(豊川任氏); 임경신(任景莘)의 딸 |
형제 | (형)이민장(李敏章), 이민적(李敏廸) (동생)이민채(李敏采), 이민발(李敏發) (서출동생)이민형(李敏馨), 이민계(李敏啓) |
처_장인 | 원주원씨(原州元氏); 원두표(元斗杓)의 딸 →(자녀) 2남 3녀 |
자녀 | (1자)이관명(李觀命) (2자)이건명(李健命) (1녀)홍중기(洪重箕)의 처 (2녀)남학명(南鶴鳴)의 처 (3녀)김창립(金昌立)의 처 |
저술문집 | 『서하집(西河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민서(李敏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1년 1월 13일, 『숙종실록』 14년 2월 2일 |
총론
[1633년(인조 11)∼1688년(숙종 14) = 56세]. 조선 후기 효종~숙종 때의 문신. 서예가. 행직(行職)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이다. 자(字)는 이중(彛仲)이고, 호(號)는 서하(西河)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경기 교하(交河) 출신으로 거주지는 서울이다. 양부는 훈련원 도정(都正)이후여(李厚輿)이고, 양모 무안박씨(務安博氏)는 개성부 도사(都事)박인(朴璘) 딸이다. 생부는 영의정이경여(李敬輿)이고, 생모 풍천임씨(豊川任氏)는 별좌(別坐)임경신(任景莘)의 딸이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고, 김수항(金壽恒)·이단하(李端夏)·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와 가깝게 교유하였다. 밀성군(密城君)이침(李琛: 세종의 서출 제 5왕자)의 7대손이고, 좌의정이관명(李觀命)과 좌의정이건명(李健命)의 아버지이며, 좌의정원두표(元斗杓)의 사위이다.
효종 초, 약관의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左郞)이 되었고,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효종 말에 친부와 양부의 상(喪)을 당하였으므로,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종 초에 홍문관 교리(校理)를 거쳐 수찬(修撰)이 되었는데, 남인의 영수인 호조 판서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역공(逆攻)을 당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좌천되었다.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다가, 이조 ·호조의 참의를 지냈다. 숙종 때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가서 향사(鄕祠)를 증축하고,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을 제향하였다.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어, 문형(文衡)을 네 차례나 지냈고, 강화부 유수(留守)로 나가서는 산성(山城)을 쌓아 임시 도읍으로 삼도록 건의하였으며, 호조 판서·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다.
효종 시대 활동
1650년(효종 1)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18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1652년(효종 3) 증광(增廣)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0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 1653년(효종 4) 봄에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어,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는데, 왕명으로 지은「칠석시(七夕試)」를 효종에게 바치자, 임금이 말안장을 하사하였다. 1654년(효종 5) 예문관 대교(待敎)로 승진하였고,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 전임되었다가, 예문관 봉교(奉敎)가 되었다. 춘추관에서 『인조실록(仁祖實錄)』을 적상산(赤裳山) 사고(史庫)에 봉안할 때 사관(史官)으로서 참여하였다. 그해 겨울에 승륙(陞六)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1655년(효종 6) 봄에 예조 좌랑(禮曹左郞)이 되었으며,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그해 여름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때 정언이민서가 효종에게 “모든 일은 가(可)가 있고 부(否)가 있은 뒤에야 정당한 데로 돌아가는 법이며, 대간(臺諫)에서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 다음에야 훌륭한 사람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가부(可否)를 묻지 않고 곡직(曲直)을 따지지 않고 성지(聖旨)가 내려지면, 신하들은 한결같이 받들어 순종만 합니다.”라고 직언하였는데, 임금이 대간의 가부(可否)를 듣고 정당한 판단을 하도록 건의한 것이었다. 그해 겨울에 양어머니 박씨(朴氏)의 상(喪)을 당하였다. 1657년(효종 8) 8월, 친아버지 영의정이경여(李敬輿)의 상(喪)을 당하였고, 그해 12월에 양아버지 훈련원 도정(都正)이후여(李厚輿)의 상을 당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 이에 이민서는 관직을 사임하고 3년 동안 선영(先塋)에서 형제들과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나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크게 대립하였다. 효종이 돌아가고 현종이 즉위하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조씨(趙氏)의 복제(服制) 문제가 대두되었다. 서인 송시열(宋時烈)·이일상(李一相) 등은 기년복(朞年服: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남인 윤선도(尹善道)·윤휴(尹鑴) 등은 삼년복(三年服: 3년 상복)을 주장하였다. 서인의 주장은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예학(禮學)에 따라 일반적인 복제를 적용한 것이었는데, 마침내 서인의 기년복이 채택되면서, 남인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되었다. 이 일로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의 강경파가 축출되었다. 이민서는 이때 상중에 있었으므로, 예송 논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였으나, 스승 인 서인 송시열의 기년복을 적극 지지하였다.
1660년(현종 1) 부모의 3년 상례(喪禮)를 마친 후,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이때 약방(藥房)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는데, 허약한 현종의 병환을 구완하느라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19세의 현종에게 ‘자주 신료들을 접견해서 정치하는 방도를 강론하고, 구신(舊臣)을 불러 모아 선왕(先王: 효종)의 뜻을 이어 받으라’고 건의하였는데, 현종이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당시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므로 조정에서는 한창 백성을 진휼할 방책에 대하여 논의하였는데, 호조 판서허적(許積)이 조세를 가혹하게 거두어들이자, 교리이민서는 동료 김만기(金萬基)와 함께 남인의 영수 호조 판서허적(許積)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크게 노한 호조 판서허적이 교리이민서·김만기를 도리어 공격하였으므로, 교리이민서와 김만기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현종은 이민서를 체직시켜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하였다. 그해 겨울에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1661년(현종 2) 홍문관 교리로서 4학(學) 가운데 중학(中學)의 교수(敎授)를 겸임하였다. 그해 윤7월에 말미를 얻어, 둘째형 이민적(李敏迪)과 함께 맏형 이민장(李敏章)의 평안도 영유(永柔)의 임소(任所)로 찾아갔는데, 그때 이민장은 영유 현감이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9월에 전라 우수사가 미곡과 포목을 배 1척에 가득 실어서 이조 참판의 집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조 참판이응시(李應蓍)는 이 물화를 받지 않고 전임자의 것이라고 떠넘겼고, 전임 이조 참판이일상(李一相)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며 받기를 거절하였으므로, 쌀과 베를 실은 배가 오래도록 한강의 마포에 정박해 있었다. 이때 사헌부 지평(持平)이익지(李之翼)는 서인의 중진인 이일상(李一相)이 충청도에서 뇌물을 받은 것이라고 탄핵하였는데, 교리이민서는 <미선(米船) 사건>의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청하였다. 새로 이조 참판에 임명된 김수항(金壽恒)은 이 사실을 조사한 후, 전임 참판이일상에게 혐의가 없다고 밝혔는데, 대간에서는 김수항을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미선(米船) 사건>으로 서인과 남인의 당파 싸움이 더욱 격화되었는데, 교리이민서는 그해 12월에 <미선(米船) 사건>을 조사한 이조 참판김수항을 공격한 양사(兩司)의 대사헌홍중보(洪重普)와 대사간이은상(李殷相)을 비판하고 체차하도록 청하였다.
1662년(현종 3) 잇단 가뭄으로 전국에 큰 흉년이 들자, 교리이민서는 ‘여러 아문(衙門)과 궁가(宮家)가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산과 바다와 강에서 얻는 이익을 조세로 거두어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보태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해 여름에 왕명을 받고 가뭄이 가장 심한 경상도 지방으로 가서 여제(厲祭)를 지냈다. 그때 마침 전라도 지방에서 부처가 땀을 흘리는 이변이 발생하였는데, 교리이민서는 미신이 백성을 미혹시키는 단서를 없애기 위하여, 불상(佛像)을 허물어 물이나 불에 내던져 버릴 것을 청하는 차자를 올렸다. 1663년(현종 4) 교리이민서는 판부사조경(趙絅)과 수찬홍우원(洪宇遠)의 죄를 논하는 차자를 올렸는데, 두 사람이 잇달아 유배된 남인의 영수 윤선도(尹善道)를 구원하기 위하여 변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이조 좌랑(吏曹左郞)을 거쳐 다시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1664년(현종 5) 다시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1665년(현종 6) 병조 좌랑(兵曹左郞)이 되었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 그해 가을에 개성부 경력(經歷)에 임명되었으나, 동춘당(同春堂)송준길(宋浚吉)이 현종에게 아뢰면서 다시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그 후, 수어사(守禦使)김좌명(金左明: 김육의 아들)의 종사관(從事官)을 역임하였다. 1666년(현종 7) 현종은 온천에서 돌아온 후, 행차에 배행(陪行)한 신하들에게 가자(加資)하도록 하였는데, 종친(宗親)들에게도 가자(加資)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민서가 차자를 올려 이를 반대하면서, 종친에게 가자(加資)하는 것은 중지되었다. 그해 여름에 남인의 영수 우의정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사직하였는데, 영부사(領府事)이경석(李景奭)이 이민서를 구원하면서 무사할 수 있었다. 그해 겨울에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다가, 의정부 검상(檢詳)을 거쳐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
1667년(현종 8) 6월에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 나주 목사(羅州 牧使)가 되었다. 나주에는 소속된 섬이 모두 40여 개나 되었는데, 바다 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다가 물길이 험하고 멀어서, 그 이전에 부임한 수령관은 한 번도 섬을 방문하지 않았다. 이민서가 나주목사로 부임한 이후, 나주의 부속 도서(島嶼)를 순시하자, 그런 관리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섬사람들은 그를 보고 감격하였다. 1668년(현종 9) 겨울에 다시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1669년(현종 10) 현종이 온천(溫泉)에 행차할 때 배종(陪從)하였다. 이때 사헌부 집의(執義)권격(權格: 권상하의 아버지)이 직언(直言)을 하다가 파직되었는데, 교리이민서가 현종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해 가을에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어,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였으며, 그해 겨울에 종부시 정(宗簿寺正)이 되었는데, 신덕 왕후(神德王后: 태조의 계비 강씨(康氏))를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하는 도감(都監)의 도청(都廳)에 임명되었다. 부묘가 끝난 후,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그때 마침 병이 있어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교하(交河)의 농장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1670년(현종 11) 1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는데, 옥당(玉堂: 홍문관)에서 숙직할 때, 술을 과음하면서 광증(狂症)이 일어나 자살을 기도하였다. 병으로 체직되면서, 그해 가을에 교하(交河)의 농장으로 돌아와서 몸을 정양하였다. 그해 10월에 외직으로 나가서 경기 고양 군수(高陽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1672년(현종 13) 호조와 예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1673년(현종 14) 어머니 임씨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서울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병환을 구완하였다. 그해 2월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74년(현종 15) 7월,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임명되어, 승문원 부제조(副提調)를 겸임하였다. 그해 가을에 친어머니 임씨(任氏)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그의 나이가 42세였다. 3년 동안 선영(先塋)에서 형제들과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갑인예송(甲寅禮訟)>으로 서인과 남인이 크게 대립하였다.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장씨(張氏)가 돌아가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조씨(趙氏)의 복제(服制) 문제가 또 다시 대두되었다. 서인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 등은 대공복(大功服: 8개월 상복)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허적(許積)·윤휴(尹鑴) 등은 기년복(朞年服: 1년 상복)을 주장하였다. 이때 서인인 한당(漢黨)김우명(金佑明: 숙종의 외조부)이 남인 허적·윤휴 등과 손을 잡고, 남인의 기년복을 채택하였으므로, 서인 김수항 등이 귀양을 갔다. 그 결과 남인이 정권을 잡고 서인은 축출되었는데, 이것을 <갑인예송(甲寅禮訟)>이라고 한다. 이듬해 진주 유생 곽세건(郭世楗)이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송시열이 예(禮)를 잘못 인용하여, 효종과 현종의 적통(嫡統)을 그르쳤다.”고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김우명은 곽세건의 상소를 문제 삼아 나이 14세의 어린 외손자인 숙종을 부추겨 송시열을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였다.(『숙종실록』 1년 1월 13일)
숙종 시대 활동
1677년(숙종 3) 봄에 외직으로 나가서 전라도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는데, 광주의 향사(郷祠)를 증축하여, <임진왜란> 때 억울하게 죽은 전라도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을 제향하였다. 그는 조정으로 돌아온 후, 숙종에게 사당의 편액을 내려 줄 것과 김덕령에게 증직할 것을 건의하였다. 전라도 유림에서는 이민서가 죽은 뒤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전라도 나주(羅州)의 서하사(西河祠)와 고창의 동산서원(東山書院)을 세워 제향하였다. 1678년(숙종 4) 광증(狂症)이 재발하면서, 광주 목사에서 체직되자, 풍광이 좋은 전라도 고창의 흥덕(興德)에 임시로 우거하면서 몸을 정양하였는데, 1679년(숙종 5) 고향인 파주의 교하(交河) 농장으로 돌아왔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의 영수 영의정허적(許積)이 죽음을 당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그해 5월에 함경도 감사(監司)로 나갔다가,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승문원 제조(提調)와 예문관 제학(提學)을 겸임하였다. 그해 6월, 마침내 문형(文衡)인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었다. 그 후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이 되었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전임되었는데, 사역원(司譯院)·와서원(瓦署院)의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그해 10월, 하늘에 혜성(彗星)이 나타나자, 놀란 숙종이 3정승과 6판서와 삼사(三司)와 2품 이상의 대신들을 불러, 천재(天災)를 해소할 방책을 물었다. 이때 이조 참판이민서는 여러 궁가(宮家)의 둔전(屯田)과 전장(田莊)을 혁파하고, 궁가(宮家)가 취하는 어염(魚鹽)의 이익을 막는 한편, 국가가 어염을 관리하여 백성들에게 생선과 소금을 값싸게 공급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줄여야만 천재가 사라질 것이라고 역설하였다.[비문]
1681년(숙종 7)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가 돌아가자, 그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는데, 그 공으로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그해 여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다시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는데,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顯宗實錄)』을 개수(改修)하는데 참여하였다. 가뭄이 심해지자, 이조 참판이민서는 쓸데없는 군사[冗兵]를 줄여서 얻어지는 군량미를 가지고 기민(饑民)을 구제하도록 건의하였다. 숙종은 이민서의 건의대로 훈련원(訓練院)의 군사를 5천 명에서 3천 명으로 줄이고 그 나머지 군사도 줄였으나, 궁가(宮家)의 둔전(屯田)·전장(田莊)을 혁파하고 어염(魚鹽)의 이익을 막자는 방책은 끝내 시행하지 않았다. 그해 7월, 이조 참판이민서는 숙종에게 소론(小論)의 박세채(朴世采)와 윤증(尹拯) 등을 등용하고, 윤선거(尹宣擧)의 부인 이씨(李氏: 윤증의 어머니)에게 정려(旌閭)하도록 청하였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강화도(江華島)가 점령당할 때, 윤증의 어머니 이씨가 자결하였기 때문이었다.
1682년(숙종 8)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예조와 이조의 참판(參判)을 거쳐, 그해 7월에 마침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승진되었다. 이때 이조 판서이민서(李敏敍)는 세종 때의 사가독서(賜暇讀書)제도를 부활하자고 주장하였다.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의 학사(學士) 중에서 몇 사람을 선발한 후, 휴가를 주어 독서당(讀書堂: 호당)에서 글을 읽고 학문을 연구하게 하였는데, 그 뒤에 역대 왕들도 홍문관의 젊은 학사 가운데 몇 사람을 선발하여 한강 가에 있는 조용한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하였다. 사가독서는 나라에서 훌륭한 학자와 문장가를 양성하기 위하여 마련한 제도였으므로, 효종 때에도 홍문관의 젊은 문관 5인을 뽑아서 사가독서하게 하였으나, 그들을 먹일 녹미를 잇대기가 어려워 중지하였기 때문에 이런 건의를 하였는데, 이때에도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행장]
1683년(숙종 9) 1월, 선공감(繕工監) 제거(提擧)를 겸임한 판부사(判府事)이상진(李尙眞)이 감역관(監役官)의 자리가 비게 되자, 그 후임자를 추천하였는데, 이조 판서이민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격노한 판부사이상진이 경연(經筵)에서 임금에게 하소연하자, 숙종은 이조 판서이민서를 파면하였다.그해 2월, 두 번째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된 이민서는 문형(文衡)으로서 <황감제(黃柑製)>를 주관하였다. 임금이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제주도 감귤을 내려주고 글을 짓게 하는 황감제에서 예문관 제학김만중(金萬重) 등이 이민서의 조카 이정명(李鼎命)의 글을 수석으로 뽑았기 때문에 대간(臺諫)으로 부터 탄핵을 받았다. 대제학이민서가 이 일로 사직하자, 이조 참판박세채가 이민서를 옹호하였으나 그도 함께 탄핵 당하였다. 그해 여름에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6월에 함경도 감사(監司)가 되었다가, 강화 유수(江華留守)가 되었다. 강화 유수이민서는 강화도에 문수성(文殊城)과 백마성(白馬城) 두 성을 쌓아임시 도읍으로 삼을 것을 숙종에게 건의하였다.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이므로 역대 왕조에서 임시 도읍으로 정하여 오랑캐의 침입을 막았으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 오랑캐 군사가 강화도를 점령한 다음부터 임시 도읍이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1684년(숙종 10) 7월, 세 번째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었다. 곧 이어 대사헌(大司憲)으로 전임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이민서는 강화도의 지형을 그린 지도(地圖)를 임금에게 바치면서, 고려의 허물어진 옛 성벽을 한길 남짓 쌓고, 그 위에 성가퀴를 설치하여 화기(火器)를 많이 배치하도록 건의하였다. 그해 12월에 한성부 판윤(判尹)이 되었다. 그는 사대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해마다 1명씩 균일하게 부역을 부과하도록 하는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으며,또 모든 백성들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나무로 만든 패목(牌木)을 몸에 차고 다니도록 하는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신분을 속이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1685년(숙종 11) 1월, 다시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는데, 그해 2월에 말미를 받아 포천(抱川)에 있는 선영(先塋)에 성묘하였다. 대사헌(大司憲)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인 교하(交河)의 농장으로 돌아왔다. 그해 5월에 숙종이 『역경(易經)』을 강독하려고 이민서와 이후경(李厚慶)에게 구두점을 찍게 하였으므로, 두 사람이 『역경』의 구두점을 정리하여, 새로 구두점을 찍어 임금에게 바쳤다. 다시 한성부 판윤(判尹)이 되었는데, 균역법(均役法)과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고, 또 강화도에 산성을 쌓도록 거듭 건의하였다. 그해 6월,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가, 그해 9월, 다시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1686년(숙종 12) 4월, 이조 판서로서 선공감(繕工監)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그해 가을에 네 번째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었다. 다시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 교하의 농장으로 돌아왔다. 그해 9월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어, 교서관(校書館)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1684년(숙종 10) 1월, 조정에서 노론 영의정김수항(金壽恒)·우의정이단하(李端夏) 등과 소론 좌의정남구만(南九萬)·이조 판서박세채(朴世采) 등이 당파를 나누어 싸우는 것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려고 결심하였는데, 김수항·이단하·남구만·박세채는 모두 이민서와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해 10월에 휴가를 얻어 황해도 해주(海州)로 갔는데, 해주 결성(潔城)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그곳에 은거할 계획을 세운 후, 경기 교하의 농장으로 돌아와 여러 번 사직상소를 올렸다. 1687년(숙종 13) 1월, 다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임명되자, 이를 사양하였으나, 영의정김수항 등의 권유로 등청(登廳)하여 호조의 복잡한 업무를 처리하였다. 그해 겨울에 지병이 악화되어, 한가한 돈녕부 지사(知事)로 옮겼으나, 1688년(숙종 14) 2월 2일, 비역(痞逆)의 병으로 서울 집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 56세였다.
이민서(李敏敍)는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는데, 편서로는 『고시선(古詩選)』·『김장군전(金將軍傳)』 등이 있다. 1701년(숙종 27) 아들 이관명(李觀命)과 이건명(李健命) 형제가 아버지 이민서의 유고(遺稿)를 모아 문집 『서하집(西河集)』 17권을 간행하였다.
성품과 일화
이민서는 타고난 성품이 굳세고 방정했으며, 기국(器局)이 의젓하고 중후하였다. 체격은 보통 사람 보다 왜소하였으나, ‘정직한 군자(君子)’의 풍채를 지녔다. 평소에는 조용히 생각하며 말수가 적었으나, 사람을 대할 때에는 성의를 다하였으므로 온화한 기운이 감돌았고, 일을 결단할 때에는 의리를 가지고 용감하게 나아가 되돌아서지 않았다. 남의 악한 것을 미워하였으나, 그가 잘못을 빌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다. 자기 몸을 다스리는 데에는 매우 엄격하였으나, 남과 견해를 다를 경우에도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넓고 수수하며, 평온하고 정직하여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다. 의리상 옳지 않은 일이면, 비록 임금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뜻을 굽히지 못할 때가 있었으나, 의리상 옳은 일이라면 비록 빈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몸을 굽혀 그 주장을 따랐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민서의 공평한 처사에 굴복하였을 뿐 아니라, 감히 사사로운 부탁을 하지 못하였다.[시장]
이민서는 아버지 이경여(李敬輿)와 어머니 풍천임씨(豊川任氏)의 5남 2녀 중에 3남으로 1633년 1월 2일 서울 집에서 태어났다. 겨우 네 살 때에 어머니 임씨가 병에 걸려 20여 일 동안 앓아눕자, 걱정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밤낮으로 어머니 곁을 지키고 떠나지 않으니, 집안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나이 6, 7세 때부터 벌써 두 형을 따라서 책을 가지고 다니며, 낮이나 밤이나 글자를 익혔다. 조금 커서는 책을 읽는 데 빠져서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였으므로, 아버지 이경여는 아들이 병이 날까봐 염려하여 너무 공부에 힘쓰지 말라고 타일렀다. 나이 14세 때에 아버지 이경여가 소현세자 빈(昭顯世子嬪)강씨(姜氏)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경상도 진도(珍島)로 귀양을 갔다가, 다시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지를 옮겼다. 이때 이민서는 맏형 이민장(李敏章)과 둘째형 이민적(李敏廸)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가시울타리 속에 갇힌 아버지를 좌우에서 받들어 모시며 뒷수발을 하였다. 이곳에서 이민서는 여가를 틈타 두 형들과 글을 강습하고 토론하면서, 아버지와 형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나이 15, 6세 때에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면서 학문과 문장이 크게 증진되어 과거를 보려고 하였으나, 아버지 이경여가 너무 일찍 출세(出世)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반대하였으므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 18세 때에 아버지 이경여가 석방되어 영의정이 되자, 그해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며, 나이 20세 때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이민서는 내행(內行)을 온전하게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효성과 우애를 천성적으로 타고났다. 나이 25세 때 아버지 이경여가 돌아가자, 홀로 된 어머니 임씨(任氏)를 모시게 되었는데, 공무에 나가거나 빈객을 접견하는 일이 아니면 일찍 돌아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항상 기쁜 얼굴로 어머니를 모시며 그 뜻을 받들었다. 또 형제 사이에 우애(友愛)가 지극해서, 서로 기뻐하고 사랑하였으므로 집안에 화기가 돌았다. 1661년(현종 2) 윤7월에 이민서는 휴가를 얻어 둘째형 이민적(李敏迪)과 함께 맏형 이민장(李敏章)이 현감으로 있는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으로 갔는데, 그때 어머니 임씨가 맏형 이민장을 따라가 영유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형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현의 관아 옆에 있는 작은 언덕에 올라가 거닐었는데, 지금 그 언덕을 학사대(學士臺)라고 부른다. 그의 나이 42세 때에 어머니 임씨의 상(喪)을 당하였다. 형제가 모두 출세하여, 맏형 이민장은 목사(牧使)를 지냈고, 둘째형 이민적은 참판(參判)을 지냈으며, 동생 이민채(李敏采)는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다. 집안의 법도가 매우 엄격하여, 아들과 조카가 비록 높은 관직에 있다고 하더라도 감히 이민서 앞에서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못하였으며, 평상시에 조정에서의 잘잘못이나 인물의 장단점을 사사로이 논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가정이 엄격하기가 마치 조정과 같았다.[시장]
이민서는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도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일찍이 질병이 있거나 공무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와 제자(諸子) 백가(百家)에 모두 정통하였으며,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의 어려운 글도 막힘없이 줄줄 외웠다. 그 중에서도 중국 춘추전국 시대와 한(漢)나라 때 문장가의 글을 더욱 많이 익혔다. 그는 붓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문장을 지었으므로,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하였으나, 내용이 정돈되어 짜임새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힘이 넘쳤으며, 격식에 아주 잘 맞았다. 스승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이민서의 글에 대하여 “화사(華奢)하면서 실질적이고 전아(典雅)하면서도 핵심이 있어서,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과 같은 문체와 격조를 가졌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문장이다.”라고 평가하였다. 판서서필원(徐必遠)은 성격이 거만해서 남의 문장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일찍이 이민서가 주문(奏聞)한 글을 보고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내가 비록 글을 잘하지는 못하나, 일찍이 이와 같은 좋은 문장은 보지 못하였다.”고 탄복하였다.[시장]
1688년(숙종14) 2월 2일 이민서의 졸기(卒記)를 보면, “성품이 강명(剛明) 방정(方正)하였고, 간묵(簡默) 정직(正直)하였으며, 조정에 벼슬한 지 3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정변(政變)을 겪었으나, 지조(志操)가 한결같았는데, 직위가 총재(冢宰: 판서)에 이르렀으나, 그 문정(門庭)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쓸쓸하기가 마치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다. 한결같이 청백(淸白)한 절개를 지켜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민서의 문장(文章)은 고상하고 건실하여 온 세상의 추앙(推仰)을 받는 바가 되었으므로, 국가의 전책(典冊)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조정에서 언제나 정승을 매복(枚卜: 정승을 뽑음)할 때가 되면 추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민서를 두고 누구를 정승으로 추천하겠는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숙종은 그의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한 것을 꺼려하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에게 낙점(落點)을 받지 못하여 정승이 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조정의 근심스러운 일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항상 근심과 번민을 하다가, 병이 되어 돌아갔다. 조야(朝野)에서 슬퍼하고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평소에 그를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도 ‘정직(正直)한 사람이 죽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하였다.(『숙종실록』 14년 2월 2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묘소는 경기도 교하(交河) 북쪽 10리 탄포(炭浦)의 언덕에 있는데, 맏아들 이관명(李觀命)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병산집(屛山集)』 10권] 처음에 경기도 포천(抱川)의 선영(先塋)에 장사지냈으나, 유택(幽宅)이 좋지 않아서, 경기도 적성(績城) 감악산(紺岳山) 남쪽에 임시로 안장하였다가, 부인 원씨(元氏)가 돌아가자, 1710년(숙종 36) 교하의 탄포에 부인과 함께 합장하였다.[묘표] 수곡(睡谷)이여(李畬)가 지은 시장(諡狀)이 있고,[『수곡집』 7권] 병산(屛山)이관명이 지은 행장(行狀)이 있다.[『서하집(西河集)』 부록] 전라도 나주(羅州)의 서하사(西河祠)와 흥덕(興德: 고창)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원주원씨(原州元氏)는 좌의정원두표(元斗杓)의 딸인데,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이관명(李觀命)은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校理)·의정부 좌의정(左議政)을 지냈고, 차남 이건명(李健命)은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의정부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장녀는 정랑홍중기(洪重箕)에게, 차녀는 시직(侍直)남학명(南鶴鳴)에게, 3녀는 판관(判官)김창립(金昌立: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서하집(西河集)』
- 『병산집(屛山集)』
- 『수곡집(睡谷集)』
- 『기언(記言)』
- 『명재유고(明齋遺稿)』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