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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총론'''== | ||
− | [1569년(선조 2)∼1634년(인조 12) = 6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공조 참의(參議)와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등을 지냈고, 봉작은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이다. 자는 무백(茂伯)이며, 호는 석담(石潭)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경상도 성주(星州)이다. 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된 이희복( | + | [1569년(선조 2)∼1634년(인조 12) = 6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공조 참의(參議)와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등을 지냈고, 봉작은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이다. 자는 무백(茂伯)이며, 호는 석담(石潭)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경상도 성주(星州)이다. 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된 이희복(李熙復)이며, 어머니 풍산 김씨(豊山金氏)는 승정원 주서(注書)김숭조(金崇祖)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준경(李遵慶)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進士) 이덕부(李德符)이다. 처음에 이이(李珥)에게 수학하다가, 나중에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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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광해군 1)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을 겸임하고,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를 겸임하였다. 그때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이 정권을 잡고 전횡(專橫)하고 있었는데, 이윤우가 사국(史局)에 있으면서 그의 비위 사실을 숨김없이 사초(史草)에 기록하였다가 사간원 헌납(獻納)한찬남(韓纘男)의 탄핵을 받고 예문관 검열에서 물러났다. 그 뒤에 예문관 대교(待敎)와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 1609년(광해군 1)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을 겸임하고,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를 겸임하였다. 그때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이 정권을 잡고 전횡(專橫)하고 있었는데, 이윤우가 사국(史局)에 있으면서 그의 비위 사실을 숨김없이 사초(史草)에 기록하였다가 사간원 헌납(獻納)한찬남(韓纘男)의 탄핵을 받고 예문관 검열에서 물러났다. 그 뒤에 예문관 대교(待敎)와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 ||
− | 1611년(광해군 3)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자 마지못하여 부임하였으나, 사헌부 (司憲府)대사헌(大司憲)정인홍이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이윤우를 탄핵하는 바람에 함경도 수성찰방(輸城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이윤우가 수성찰방의 임기를 채우고 돌아오진 열흘 만에 우의정정인홍은 이윤우를 다시 함경도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임명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9009_001 『광해군일기』 5년 9월 9일]) 1613년(광해군 5) 이윤우는 불평하지 않고 경성판관으로 부임하여 오랑캐의 풍속을 교화(敎化)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임기를 채우고 고향 성주로 돌아올 때 그곳 사람들이 철비(鐵碑)를 세우고 추모하였다. 광해군(光海君) 후반기에 정인홍과 이이첨( | + | 1611년(광해군 3)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자 마지못하여 부임하였으나, 사헌부 (司憲府)대사헌(大司憲)정인홍이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이윤우를 탄핵하는 바람에 함경도 수성찰방(輸城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이윤우가 수성찰방의 임기를 채우고 돌아오진 열흘 만에 우의정정인홍은 이윤우를 다시 함경도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임명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9009_001 『광해군일기』 5년 9월 9일]) 1613년(광해군 5) 이윤우는 불평하지 않고 경성판관으로 부임하여 오랑캐의 풍속을 교화(敎化)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임기를 채우고 고향 성주로 돌아올 때 그곳 사람들이 철비(鐵碑)를 세우고 추모하였다. 광해군(光海君) 후반기에 정인홍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廢黜)하고 서인(西人)을 탄압하자, 이윤우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 성주에서 은둔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스승인 정구가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의 예를 행하는 한편, 시호를 청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1201005_001 『광해군일기』 12년 1월 5일]) |
=='''인조 시대 활동'''== | =='''인조 시대 활동'''== | ||
− |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자 예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고,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다가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과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9004_002 『인조실록』 1년 9월 4일]),([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10029_002 『인조실록』 1년 10월 29일]) 그리고 연산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추대한 사람 53명을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훈할 때 이윤우는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녹훈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 | + |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자 예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고,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다가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과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9004_002 『인조실록』 1년 9월 4일]),([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10029_002 『인조실록』 1년 10월 29일]) 그리고 연산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추대한 사람 53명을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훈할 때 이윤우는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녹훈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가 공주(公州)로 피난하면서 이윤우가 일찍이 함경도 수령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관민(官民)의 마음을 얻었다며 특별히 초유어사(招諭御史)에 임명하였다. 당시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 이괄(李适)이 평안도 병사를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전국이 어수선하였으므로, 이윤우는 어사(御使)로서 함경도에 가서 함경도 백성들을 선유(宣諭)하며 안심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2008_005 『인조실록』 2년 2월 8일]) 그해 겨울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여 경연(經筵)에서 정치의 폐단을 논할 때에 아뢰기를, “군신(君臣)의 예가 너무 엄하니, 임금의 위엄을 줄여서 신하들에게 부드럽게 대하소서.” 하였다. |
1626년(인조 4) 인조가 생모(生母)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을 당하였다. 이에 모두 후비(后妃)의 예(禮)로써 국장(國葬)을 치를 것을 주장하였으나, 사간원 사간이었던 이윤우는 이에 반대하여 여섯 가지 조목을 열거하면서 후비의 예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극력 논쟁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402008_001 『인조실록』 4년 2월 8일]) 인조가 노하여 이윤우를 사간의 관직에서 교체하고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전직시켰다가, 의정부 사인(舍人)에 임명하여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410012_003 『인조실록』 4년 10월 12일]) 1627년(인조 5)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가례(嘉禮)를 도왔는데, 그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01017_006 『인조실록』 6년 1월 17일]) 그 뒤에 담양부사(潭陽府使)로 나가서, 먼저 자신이 청렴(淸廉)을 지키고 아전들에게 간악하고 교활한 짓을 못하게 하였으며, 반드시 교육을 우선으로 삼아 향학(鄕學)을 진흥하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에 고을 사람들이 정청비(政淸碑)와 흥학비(興學碑)를 세웠다. | 1626년(인조 4) 인조가 생모(生母)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을 당하였다. 이에 모두 후비(后妃)의 예(禮)로써 국장(國葬)을 치를 것을 주장하였으나, 사간원 사간이었던 이윤우는 이에 반대하여 여섯 가지 조목을 열거하면서 후비의 예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극력 논쟁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402008_001 『인조실록』 4년 2월 8일]) 인조가 노하여 이윤우를 사간의 관직에서 교체하고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전직시켰다가, 의정부 사인(舍人)에 임명하여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410012_003 『인조실록』 4년 10월 12일]) 1627년(인조 5)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가례(嘉禮)를 도왔는데, 그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601017_006 『인조실록』 6년 1월 17일]) 그 뒤에 담양부사(潭陽府使)로 나가서, 먼저 자신이 청렴(淸廉)을 지키고 아전들에게 간악하고 교활한 짓을 못하게 하였으며, 반드시 교육을 우선으로 삼아 향학(鄕學)을 진흥하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에 고을 사람들이 정청비(政淸碑)와 흥학비(興學碑)를 세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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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경상도 성주 도당골의 언덕에 있는데, 허목(許穆)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정사원종공신이었으므로, 죽은 뒤에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경상도 칠곡(漆谷)의 사양서원(泗陽書院)과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 묘소는 경상도 성주 도당골의 언덕에 있는데, 허목(許穆)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정사원종공신이었으므로, 죽은 뒤에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경상도 칠곡(漆谷)의 사양서원(泗陽書院)과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 ||
− | 부인 인천 채씨(仁川蔡氏)는 생원(生員) 채응린(蔡應獜)의 딸이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이도창( | + | 부인 인천 채씨(仁川蔡氏)는 생원(生員) 채응린(蔡應獜)의 딸이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이도창(李道昌)은 의금부 도사(都事)를 지냈고, 차남 이도장(李道長)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應敎)를 지냈으며, 3남 이도장(李道章)은 직장(直長)을 지냈다. 그 중에서 자손이 번성한 집안은 차남 이도장 계통인데, 이도장의 장남 이원정(李元禎)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判書)를 지냈고, 차남 이원록(李元祿)은 장연부사(長淵府使)를 지냈다. 또 이원정의 장남 이담명(李聃命)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지냈다.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2018년 1월 9일 (화) 22:5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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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윤우 |
한글표제 | 이윤우 |
한자표제 | 李潤雨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무백(茂伯) |
호 | 석담(石潭) |
봉작 |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9년(선조 2) |
사망 | 1634년(인조 12) |
본관 | 광주(廣州) |
주거지 | 서울, 성주(星州) |
묘소소재지 | 경상도 성주(星州) 도당골 |
증조부 | 이덕부(李德符) |
조부 | 이준경(李遵慶) |
부 | 이희복(李熙復) |
모_외조 | 풍산 김씨(豊山金氏) : 김숭조(金崇祖)의 딸 |
처_장인 | 인천 채씨(仁川蔡氏) : 채응린(蔡應麟)의 딸 →(자녀)3남 2녀 |
자녀 | (1자)이도창(李道昌) (2자)이도장(李道長) (3자)이도장(李道章) |
저술문집 | 『석담집(石潭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윤우(李潤雨)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5년 9월 9일, 『광해군일기』 12년 1월 5일, 『인조실록』 1년 9월 4일, 『인조실록』 1년 10월 29일, 『인조실록』 2년 2월 8일, 『인조실록』 4년 2월 8일, 『인조실록』 4년 10월 12일, 『인조실록』 6년 1월 17일 |
총론
[1569년(선조 2)∼1634년(인조 12) = 6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공조 참의(參議)와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등을 지냈고, 봉작은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이다. 자는 무백(茂伯)이며, 호는 석담(石潭)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경상도 성주(星州)이다. 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된 이희복(李熙復)이며, 어머니 풍산 김씨(豊山金氏)는 승정원 주서(注書)김숭조(金崇祖)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준경(李遵慶)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進士) 이덕부(李德符)이다. 처음에 이이(李珥)에게 수학하다가, 나중에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91년(선조 24)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3세였다.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으나 대과에 연거푸 실패하였다가, 38세가 되던 1606년(선조 39)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성균관 권지(權知) 학유(學諭)가 되었다가 선조 말년에 참하관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을 겸임하고,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를 겸임하였다. 그때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이 정권을 잡고 전횡(專橫)하고 있었는데, 이윤우가 사국(史局)에 있으면서 그의 비위 사실을 숨김없이 사초(史草)에 기록하였다가 사간원 헌납(獻納)한찬남(韓纘男)의 탄핵을 받고 예문관 검열에서 물러났다. 그 뒤에 예문관 대교(待敎)와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11년(광해군 3)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자 마지못하여 부임하였으나, 사헌부 (司憲府)대사헌(大司憲)정인홍이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이윤우를 탄핵하는 바람에 함경도 수성찰방(輸城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이윤우가 수성찰방의 임기를 채우고 돌아오진 열흘 만에 우의정정인홍은 이윤우를 다시 함경도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임명하였다.(『광해군일기』 5년 9월 9일) 1613년(광해군 5) 이윤우는 불평하지 않고 경성판관으로 부임하여 오랑캐의 풍속을 교화(敎化)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임기를 채우고 고향 성주로 돌아올 때 그곳 사람들이 철비(鐵碑)를 세우고 추모하였다. 광해군(光海君) 후반기에 정인홍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廢黜)하고 서인(西人)을 탄압하자, 이윤우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 성주에서 은둔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스승인 정구가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의 예를 행하는 한편, 시호를 청하였다.(『광해군일기』 12년 1월 5일)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자 예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고,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다가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과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인조실록』 1년 9월 4일),(『인조실록』 1년 10월 29일) 그리고 연산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추대한 사람 53명을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훈할 때 이윤우는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녹훈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가 공주(公州)로 피난하면서 이윤우가 일찍이 함경도 수령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관민(官民)의 마음을 얻었다며 특별히 초유어사(招諭御史)에 임명하였다. 당시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 이괄(李适)이 평안도 병사를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전국이 어수선하였으므로, 이윤우는 어사(御使)로서 함경도에 가서 함경도 백성들을 선유(宣諭)하며 안심시켰다.(『인조실록』 2년 2월 8일) 그해 겨울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여 경연(經筵)에서 정치의 폐단을 논할 때에 아뢰기를, “군신(君臣)의 예가 너무 엄하니, 임금의 위엄을 줄여서 신하들에게 부드럽게 대하소서.” 하였다.
1626년(인조 4) 인조가 생모(生母)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을 당하였다. 이에 모두 후비(后妃)의 예(禮)로써 국장(國葬)을 치를 것을 주장하였으나, 사간원 사간이었던 이윤우는 이에 반대하여 여섯 가지 조목을 열거하면서 후비의 예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극력 논쟁하였다.(『인조실록』 4년 2월 8일) 인조가 노하여 이윤우를 사간의 관직에서 교체하고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전직시켰다가, 의정부 사인(舍人)에 임명하여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게 하였다.(『인조실록』 4년 10월 12일) 1627년(인조 5)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가례(嘉禮)를 도왔는데, 그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인조실록』 6년 1월 17일) 그 뒤에 담양부사(潭陽府使)로 나가서, 먼저 자신이 청렴(淸廉)을 지키고 아전들에게 간악하고 교활한 짓을 못하게 하였으며, 반드시 교육을 우선으로 삼아 향학(鄕學)을 진흥하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에 고을 사람들이 정청비(政淸碑)와 흥학비(興學碑)를 세웠다.
1631년(인조 9) 공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에 중풍(中風)에 걸려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성주로 돌아와서 3년 동안 몸을 정양하였다. 그러다가 1634년(인조 12) 8월 29일 중풍으로 고향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6세였다.
문집으로 『석담집(石潭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이윤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청렴하고 온화하며, 행실이 확고하고 흠이 없었다. 집안이 한미(寒微)하여 음직(蔭職)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로지 농사만 짓고 공부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서인의 중진으로서 25년 동안 벼슬을 하며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이윤우는 이이 및 정구 같은 대현(大賢)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집에 있을 때에는 부모를 섬기며, 형제간의 우애를 올바른 군자의 선행(善行)으로 여겼고, 곧으면서도 온화하고 엄하면서도 너그러움이 있었다. 신하가 되어서는 충직한 도리로써 임금을 보필했고, 고을의 수령관이 되어서는 백성들을 교육시키고 풍속을 교화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집안의 가장(家長)으로서는 누추한 집에 살면서도 마음을 평안하고 고요하게 가지고, 외물(外物)에 끌려 유혹되지 않았으며, 항상 독서를 즐겼다. 집안의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천도(天道)는 겸손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인도(人道)는 차고 넘치는 것을 미워한다. 내가 보잘것없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벼슬이 대부(大夫)의 지위에 이르렀으니, 또한 만족한 것이다. 내가 날마다 힘쓰는 것은 큰 허물없이 바르게 살다가 죽는 일이다.” 하였다. 일생 동안 반드시 행실을 올바르게 하고 남에게 사양하고 물건을 받는 것을 조심하였다. 도(道)를 지키는 데 구차함이 없었고, 오로지 학문을 일으키고 글을 숭상하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성주 도당골의 언덕에 있는데, 허목(許穆)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정사원종공신이었으므로, 죽은 뒤에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경상도 칠곡(漆谷)의 사양서원(泗陽書院)과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인천 채씨(仁川蔡氏)는 생원(生員) 채응린(蔡應獜)의 딸이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이도창(李道昌)은 의금부 도사(都事)를 지냈고, 차남 이도장(李道長)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應敎)를 지냈으며, 3남 이도장(李道章)은 직장(直長)을 지냈다. 그 중에서 자손이 번성한 집안은 차남 이도장 계통인데, 이도장의 장남 이원정(李元禎)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判書)를 지냈고, 차남 이원록(李元祿)은 장연부사(長淵府使)를 지냈다. 또 이원정의 장남 이담명(李聃命)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지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미수기언(眉叟記言)』
- 『동명집(東溟集)』
- 『대산집(大山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수당집(修堂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여헌집(旅軒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복집(愚伏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상변통고(常變通攷)』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한강집(寒岡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