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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55 기준 최신판




총론

[1589(선조 22)∼1645(인조 23) = 57세]. 조선 후기 인조 때의 무신. 초명은 이기집(李起集)이었는데, 인조가 아명인 기축(己丑)을 본떠서 이기축(李起築)이라고 사명(賜名)하였다.[시장] 행직(行職)은 위원 군수(渭源郡守)·어영 별장(御營別將)이고, 봉작(封爵)은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의 완계군(完溪君)이며, 증직(贈職)은 한성부 판윤(判尹)이다. 자(字)는 희열(希說)이다.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기도 양주(楊州) 송산리(松山里) 출신으로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충청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이경유(李慶裕)이고, 어머니 장흥고씨(長興高氏)는 옥구현감(沃溝縣監)고언명(高彦命: 고경명의 동생)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이고, 병조 판서이서(李曙)의 4촌 동생이다.

능양군(綾陽君: 인조)과는 어릴 때 같은 마을에서 자란 동네친구다.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4촌 형 이서(李曙)가 신경진(申景禛)과 <인조반정>의 쿠데타를 모의할 때 이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서가 장단부사(長湍府使)로 부임할 때 별장(別將)으로 따라갔는데, 서울의 능양군(綾陽君)과 평안도 박천의 가산진(嘉山鎭) 별장(別將)신경진과의 연락을 담당하는 한편, 이서의 명을 받고 장단의 장정 7백여 명을 뽑아 훈련시켰다. 장단의 군사 7백여 명은 <인조반정> 때 반정군의 주력 부대로 활동하였는데, 이기축은 그 선봉장이 되어 공훈을 세우고,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책훈되어 금군장(禁軍將)에 임명되었다. 평안도 위원군수(渭源郡守)로 나갔는데 주민이 월강(越江)하여 채삼(採蔘)하다가 돌아오지 않으면서 파직되었으나, 곧이어 호위별장(扈衛別將)·오위장(五衛將)·군문(軍門)의 천총별장(千摠別將)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어영별장(御營別將)에 임명되어, 청나라 오랑캐 군사와 싸웠는데, 병조 판서이서(李曙)가 남한산성에서 오랑캐 군사와 싸우다가 병사하자, 세상에 살아갈 의욕을 잃고 고향 양주(陽州) 송산리(松山里)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0년(광해군 12)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광해군 말기에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이 <인조반정(仁祖反正)>에 대하여 처음 모의할 때, 이들은 구인후(具仁垕)의 고종 4촌 동생인 능양군(綾陽君)이종(李倧)을 추대하기로 합의하였는데, 무관인 이서와 신경진·구인후는 서로 절친한 사이였다. 이기축은 4촌 형 이서(李曙)의 권유로 이에 참여하였는데, 왕으로 추대하기로 합의한 능양군은 이기축이 어릴 때 같은 동네에서 자라며 함께 놀았던 동네 소꿉 친구였다. 1622년(광해군 14) 이서가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임명되자, 이기축은 이서의 별장(別將)으로 따라갔다. 그때 이기축은 서울의 능양군과 장단부사이서·박천의 가산진(嘉山鎭) 별장(別將)인 신경진 사이를 오가며 연락하는 일을 도맡았다. 이때 장단 부사이서는 이미 광해군에게 경내의 덕진(德津)에 산성(山城)을 쌓을 것을 청하여 허락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단에서 건장한 장정 7백여 명을 뽑아 산성을 쌓도록 하는 한편, 군사의 편제를 짜서 4촌 동생 이기축(李起築)과 매제(妹弟) 이의배(李義培)에게 이들을 훈련시켜서, 장차 거사에 동원할 준비를 철저히 진행하였다.

1623년(광해군 14) 3월 12일 밤중에 장단부사이서와 별장이기축이 장단의 군사 7백여 명을 거느리고, 연서역(延曙驛)에 이르러 능양군을 모시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였다. 그날 거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홍제원(弘濟院)에 모였으나, 모인 사람들은 오합지졸의 군중 7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기축이 선봉장이 되어 장단의 군사 7백여 명을 거느리고 창덕궁을 포위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인조(仁祖)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도 이기축은 4촌 형 이서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해 3월,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을 인조로 추대하는 데 공훈을 세운 53명에게 <정사공신(靖社功臣)>을 책훈(策勳)하였는데, 신경진(申景禛)·이서(李曙) 등 10명은 1등 공신에, 이괄(李适)·구인후(具仁垕) 등 15명은 2등 공신에, 이기축(李起築)·이원영(李元榮) 등 28명은 3등 공신에 각각 책봉되었다. 그 뒤에 이기축의 맏아들 이만실(李萬實)은 아버지의 덕으로 완림군(完林君)에 봉해졌으며, 심지어 이기축의 첩의 사위인 종 무생(戊生)도 공신록(功臣錄)에 기록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3년 9월 26일] 1626년(인조 4) 4월,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품되어, 다대포진(多大浦鎭)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4년 4월 3일] 1628년(인조 6) 10월, 공신(功臣)들이 모여서 회맹(會盟)하였으나, 다대포 수군첨절제사이기축은 변장(邊將)으로서의 직무가 막중하였으므로 회맹(會盟)에 참여하지 못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6년 10월 11일]

1629년(인조 7) 2월, 평안도 위원 군수(渭原郡守)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위원으로 떠날 때 인조에게 사폐(辭陛: 하직 인사)하자, 궁시(弓矢)를 내려주었다. 1630년(인조 8) 11월, 평안도 감사가 “위원(渭源)의 토착민 최세남(崔世男)과 최응주(崔應周) 등이 인삼을 캐러 월경(越境)하였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군수이기축(李起築)의 죄상을 조정에서 처리하소서.” 하고 장계(狀啓)하자, 조정에서 군수이기축을 파직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8년 11월 19일] 당시 변경 지방에 살던 농민들이 조정에 진상(進上)할 산삼(山蔘)을 캐기 위하여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 지역으로 들어갔는데, 농경에 알맞은 땅을 발견하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이 바로 간도(間島) 개척과 이민(移民)의 시작이었다. 그 뒤에 이기축은 즉시 서용(敍用)되어, 호위별장(扈衛別將)·오위장(五衛將)·군문(軍門)의 천총별장(千摠別將) 등을 역임하였다.[시장]

1633년(인조 11) 10월, 천총별장이기축이 어머니의 병환으로 오랫동안 숙위(宿衛)하는 자리를 비우자, 병조에서 이를 문책하였다. 이기축은 “모친의 병으로 말미를 받아 고향 양주(楊州)로 내려갔으나, 모친의 병이 날이 갈수록 위중하여 자식 된 마음에 차마 곁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집에서 글을 올렸다. 이에 병조에서는 “숙위(宿衛)를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가 없으니, 이기축을 개차(改差)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아뢰자, 임금이 윤허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1년 10월 1일] 1634년(인조 12) 2월 평안도 삭주 부사(朔州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사폐(辭陛)하는 날에 인조가 인견하고 궁시(弓矢)를 내려주며 술을 권하자 이기축이 사양하지 않고 술을 마시다가 취하여 술주정[醉狂]을 부리며, 부축을 받고 나왔다. 사헌부에서 삭주 부사이기축이 술주정을 부린 죄에 대하여 논하자, 인조가 웃으며 “내가 이 사람의 술주정을 옛날부터 잘 알고 있는데, 책망할 게 무엇이 있는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간에서 여러 달 동안 계속 탄핵하자, 부득이 체직시켰다.[시장]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 이 일어났을 때, 금군장(禁軍將)으로서 어가(御駕)를 따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는데, 어영 별장(御營別將)에 임명되어 남쪽 성벽을 지켰다. 12월 21일에 자원하여 성 밖으로 나가 오랑캐 군사와 싸워서 적 10여 급(級)을 참획(斬獲)하여 돌아오자, 불안에 떨던 성안의 사람들이 조금 진정되었다. 이때 이기축의 사촌 형인 병조 판서이서는 북쪽의 성벽을 맡아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원래 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1637년(인조 15) 1월 2일, 찬바람이 불고 눈이 오는 가운데에도 부축을 받으면서 성벽에 올라가 북문을 지키다가 쓰러져서 마침내 운명(殞命)하였다. 이때 이기축이 달려가 이서의 시신을 산성 안에 있는 장경사(長慶寺)에 모셨다. 그해 1월 19일 밤중에 적군이 동쪽 성벽을 넘어 갑자기 쳐들어오자 남한산성이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는데, 장경사(長慶寺)에 있다가 뛰쳐나온 이기축이 몸을 던져 죽을힘을 다해 독전(督戰)하면서 마침내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적군이 물러간 뒤에 인조가 친림(親臨)하여 이기축을 위로하고, 특별히 그를 종2품하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고 완계군(完溪君)에 봉하였다.[시장] 그러나 4촌 형 이서가 갑자기 돌아간 후, 그는 항상 비감에 젖어 벼슬살이할 의욕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기를 원하였다.

그해 2월이 되면서 남한산성 안에는 군량미가 떨어지고,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되어 세자빈 강씨(姜氏)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등이 포로가 되자. 결국 인조는 청나라와 강화(講和)한 후,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항복하였는데, 강화의 조건은 세폐(歲幣)를 바치고 세자와 대군을 볼모로 보내는 것이었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청나라의 심양(瀋陽)으로 가게 되었을 때, 인조는 특별히 이기축에게 세자 일행을 배종(陪從)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기축은 남한산성에서 내려오자마자, 세자 일행을 배종(陪從)하여 심양(瀋陽)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해 3월, 소현세자가 좌부승지한흥일을 통하여 “이기축(李起築)은 서얼 출신이어서 사람들에게 호령을 세우지 못합니다. 이 사람을 데려가면 단지 사람 숫자만 늘리게 될 뿐이니, 이 사람을 돌려보내고 일행을 단속하는 일은 신해(申垓)에게 맡기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하고 아뢰었으므로, 인조가 그대로 따랐다.[『승정원일기』인조 15년 3월 4일] 이에 이기축은 소현세자를 따라 청나라 심양으로 가다가, 도중에 서울로 돌아와 인조를 호위하게 되었다.

그해 8월에 호위 별장(扈衛別將)에 임명되어, 인조를 호위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이기축은 어머니가 늙었다고 자원하여 강원도 삼척 첨사(三陟僉使)로 나갔다. 1639년(인조 17) 삼척 첨사의 임기가 끝나자,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양주(楊州) 송산리(松山里)로 돌아왔다. 4촌 형 이서가 갑자기 돌아간 다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기를 원했던 그는 이때 송산리로 돌아와 새 집을 짓고 조용히 은거하였다. 1642년(인조 20)에 인조가 이기축을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임명하였으나, 이기축은 어머니의 병환을 핑계하고 사양하였다. 1644년(인조 22) 어머니 상(喪)을 당하자,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몹시 슬퍼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었는데, 한 해가 지나면서 병이 더욱 위중해졌다. 1645년 인조 23년) 6월 6일 고향 양주(楊州) 송산리(松山里) 집에서 지병으로 돌아가니, 향년 57세였다.[시장]

이기축의 부음이 알려지자, 인조가 애도해 마지않았는데, 입관(入棺)하기 전에 특별히 한성부 판윤(判尹)으로 증직(贈職)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예조로 하여금 장례(葬禮)에 필요한 물품을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고, 3년분의 녹봉을 그 가족들에게 지급하게 하였다.[시장]

<인조반정>과 이기축

무인 이기축(李起築)은 완풍군(完豐君)이서(李曙)와 4촌 형제였는데, 지기(志氣)가 서로 투합하였으므로 하루라도 떨어져 지내면 안 될 정도였다. 광해군 때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출시키기 위한 정청(庭請)에 반대하였던 이서는 절친한 무장 신경진(申景禛)과 함께 쿠데타를 모의하고 구인후의 고종 4촌 동생 능양군(綾陽君)이종(李倧: 인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이기축은 어릴 때 능양군과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소꿉친구였으므로, 이서는 4촌 동생 이기축에게 이 모의에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시장]

1621년(광해군 13) 이서가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임명되자, 그는 4촌 동생 이기축(李起築)을 별장(別將)으로 데리고 갔다. 장단 부사이서는 광해군으로 부터 경내의 덕진(德津)에 산성(山城)을 쌓도록 이미 허락 받았기 때문에, 장단에서 7백여 명의 건장한 장정을 뽑아 산성을 쌓도록 하는 한편, 군사의 편제를 짠 후, 4촌 동생 이기축과 매제(妹弟) 이의배(李義培)에게 이들을 훈련시켜서, 거사에 동원할 준비를 철저하게 진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박승종(朴承宗)의 의심을 받았던 신경진은 평안도 박천(博川) 가산진(嘉山鎭)의 별장(別將)으로 쫓겨났다. 그러므로 장단의 이서가 서울의 능양군∙박천의 신경진과 비밀 연락을 주고받을 때, 이기축이 말을 타고 세 곳을 왕래하면서 편지를 전달하고 답장을 받아왔다. 이기축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여 새벽에 말을 타고 서울로 들어가 몰래 능양군을 만나고 곧장 장단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가산진으로 가서 신경진을 만난 후, 밤을 새워 말을 달려 장단으로 들어왔다. 평안도 박천의 가산진은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서 자갈밭 길을 한참 달려가야 하는 곳이었으므로, 그가 타던 말이 힘센 준마(駿馬)였음에도 불구하고, 1년 사이에 세 마리나 죽을 정도였다. 당시 대북의 이이첨(李爾瞻) 일당과 영의정박승종 등은 이미 신경진과 이서의 반정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고 사방에서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으나, 영민하고 삼가는 성품을 가졌던 이기축이 위기의 순간마다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잘 대처하였고, 일의 기미를 먼저 살펴서 큰일이 실패하지 않도록 조처하였다. [시장]

1623년 3월 12일 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는데, 부장(副將)으로 추대된 이귀(李貴)가 초저녁에 두 아들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과 함께 홍제원에 도착하였을 때, 그 앞에 모인 사람들은 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 등이 데리고 온 장정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 대장(大將) 김류가 나중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홍제원 앞에 모인 군중은 겨우 7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거사하는 날에 맞추어 미리 서울로 올라온 신경진은 능양군을 모시고 초저녁부터 연서역(延曙驛)으로 나가 이서가 이끄는 장단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장단 부사이서는 12일 초저녁에 장단에서 군사 7백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마침 달이 밝아서 행군하기에 불편함은 없었으나, 남의 눈을 피하여 선봉장(先鋒將) 이기축과 이의배(李義培)가 군사를 이끌고 밤새 행군하여야 했으므로, 밤 2경이 넘어서야 연서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단의 군사가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게 되자, 장단 부사이서는 이기축에게 먼저 달려가서 능양군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급히 말을 달려 연서역에 도착한 선봉장 이기축은 말에서 내려 길옆에서 능양군에게 절을 한 후, 장단의 군사가 곧 도착할 것이라고 보고하자, 초조하게 장단 군사를 기다리던 능양군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본인이 입었던 갓옷[御袍]을 벗어서 손수 이기축에게 입혀 주었다.[시장]

신경진의 마중을 받은 장단 부사이서가 능양군을 모시고 홍제원에 도착하니,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김류·이귀·심기원·최명길·김자점 등이 거느린 장정들은 오합지졸의 군중 7백여 명뿐이었다. 이서가 거느린 장단의 군사는 훈련된 7백여 명의 정예병이었으므로, 이들이 반정군(反正軍)의 주력 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밤 3경에 대장(大將) 김류(金瑬)와 부장(副將) 이귀(李貴)가 1천 4백여 명의 반정군을 지휘하여, 광해군이 거처하는 창덕궁(昌德宮)을 포위하였다. 반정군이 궐내로 쳐들어가자, 왕궁을 호위하던 군사들은 모두 흩어져서 도망하고, 광해군은 후원의 담장을 넘어서 민가로 숨어들었다. 3월 13일 아침에 대장 김류와 장단 부사이서가 서궁(西宮)에 유폐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모셔다가 복위(復位)시키고, 인목대비의 명령을 받아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인조(仁祖)이다.[『인조실록』 총서]

1623년(인조 1) 윤10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훈을 세운 53명을 뽑아 <정사공신(靖社功臣)>을 책훈할 때, 두 대장 김류(金瑬)와 이귀(李貴)는 자기 심복만을 뽑아 1등, 2등에 넣고 나머지는 모두 3등에 넣었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에도 공신으로 책봉되지 못한 사람이 대다수였으나,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연줄을 대서 <정사공신>에 책훈되려고 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서로 자기의 공을 내세우고 아귀다툼을 벌여 조정이 매우 시끄러웠다. <인조반정>에 1등 공신으로 책훈된 이서는 <정사공신>을 공평하게 선정하지 못하는 김류와 이귀에게 크게 화가 나서, 본인을 3등에 넣고 이기축을 별단(別單)에 넣은 정안(正案) 문서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그 문안을 읽어본 인조가 이서에게 “경이 정사공신 1등에 들어가지 않고, 이기축도 정훈(正勳)에 넣지 않고, 별단에 넣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하고 묻자, 이서는“소신이 외람되게 정훈(正勳)에 들어갔는데, 더군다나 신의 지친(至親)인 이기축이 무슨 공로가 있다고 감히 정훈에 들어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인조는 정안(正案)을 다시 승정원에 내려주면서“경은 마땅히 1등에 들어가야 한다. 이기축의 공로는 내가 잘 아는데, 그를 2등에 꼭 넣어야 한다. 내가 어릴 때 이기축과 함께 놀면서 그의 아명(兒名)을 항상 불렀는데, 이번에 공신으로 녹훈(錄勳)할 때에는 꼭 아명으로 기록하도록 하라.”고 하교하면서, 즉시 승정원에 명하여 이기축을 정훈(正勳)에 넣도록 하였다. 이에 김류와 이귀가 마지못해 이서를 <정사공신> 1등으로, 이기축을 3등공신으로 책훈하였다.

며칠 후 <정사공신(靖社功臣)>을 발표하고 회맹(會盟)할 때, 인조는 그의 이름을‘이기축(李起築)’으로 불렀으며, 공신 녹권(錄券)에 그의 이름을 ‘이기축(李起築)’이라고 쓰도록 전교(傳敎)하였다. 이기축의 초명(初名)은 어릴 때의 이름[兒名]인‘기축(己丑)’과 음이 비슷한 한자 이기집(李起集)으로 지어졌으나, 이때 인조가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였던 그의 아명(兒名)을 한자‘기축(起築)’으로 바꾸어‘이기축(李起築)’이라는 이름을 사명(賜名)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이것은 아주 드문 특전(特典)이었다. 이기축은 <정사공신> 3등에 녹훈된 후,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어 임금을 호위하는 금군장(禁軍將)에 임명되었다.[시장]

비록 대장 김류(金瑬)와 부장(副將) 이귀(李貴)가 1천 4백여 명의 반정군을 지휘하여, <인조반정>에 성공하였다고 하지만, 주력 부대는 결국 이서가 지휘하는 장단의 군사 7백여 명뿐이었다. 그해 윤10월, <정사공신>을 책봉한 뒤에 인조는 이서를 불러 장단의 군사 중에서 공신에 책봉할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명하였다. 인조가 이서에게 “장단 사람으로서 정훈(正勳)에 들어간 자는 몇 명인가.” 하고 물으니, 이서가 “네 사람입니다. 이의배(李義培)는 신의 매제(妹弟)인데 별장(別將)으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왔고, 이기축(李起築)은 신의 서얼(庶孼) 친족이며, 송시범(宋時範)은 신의 군관으로 모두 김류·이귀의 처소를 왕래하며 편지를 전달하였고, 강득(姜得)은 장단 파총(把摠)으로서 군병을 거느렸던 자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인조가 “이 밖에 더 녹훈할 만한 사람이 없는가. 이 거사는 장단의 병력이 큰 힘이 되었는데도 정훈에 참여한 자가 네 사람뿐이니,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하고 묻자, 이서는 “정승택(鄭承澤)·조집(趙集)·권득수(權得壽)는 모두 신의 군관으로서 각기 공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류·이귀 두 대장이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므로 정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인조실록』 1년 윤10월 19일)

성품과 일화

모습이 청수(淸秀)하고 지모(智謀)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지기(志氣)가 호방(豪放)하였다. 겉으로는 해학(諧謔)을 좋아하였으나 안으로는 몸을 삼가고 조심하였으며, 평생 동안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사람의 선행(善行)을 보면 마치 자기가 포상(褒賞)을 받은 듯이 기뻐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곤궁한 것을 보면 반드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나라 일에 정성을 다해서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으며 부지런하였는데, 임종하는 날까지 나라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시장]

이기축은 1589년(선조 22년) 10월 7일에 출생하였는데, 아버지 이경유(李慶裕)는 충청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였고, 어머니 장흥고씨(長興高氏)는 옥구현감(沃溝縣監)고언명(高彦命)의 딸인데, 외조부 고언명은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동생이다. 그러나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는 ‘서얼(庶孼) 출신’이라고 기록하였으므로, 측실의 아들이었던 것 같다. 거주지는 서울과 경기 양주(陽州)의 송산리(松山里) 두 곳에 있었는데, 서울 집은 인조(仁祖)의 잠저(潛邸: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와 이웃하여 있었다. 이기축은 아명(兒名)을 ‘기축(己丑)’이라고 불렀는데, 아명 ‘기축’은 그가 태어난 해가 기축년(1589)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인조는 어렸을 때 서울의 한 동네에서 같이 자라면서 그를 ‘기축’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서로 만났을 때 초명(初名) 이기집(李起集)이라는 이름이 익숙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기축(李起築)’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신하의 이름을 지어서 사명(賜名)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는데, 이기축이 사명(賜名)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가문의 큰 영광이라고 하였다. 이기축은 어렸을 때 영민(英敏)하고 숙성(夙成)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자라서는 의협심(義俠心)이 강하였으나, 방탕(放蕩)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고 오직 궁마술(弓馬術)만을 일삼았다. 1620년(광해군 12)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총명한 감식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사람을 한번 보면 곧 그의 속마음까지 알아맞혔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감복하였다. 완풍군(完豐君)이서(李曙)와는 4촌 형제인데, 양주(楊州) 송산리(松山里)에서 같이 자라면서, 지기(志氣)가 서로 투합하여 하루도 떨어져 지내지 않았다. 4촌 형 이서(李曙)가 신경진(申景禛)과 함께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모의할 때 구인후(具仁垕)의 고종 4촌 동생 능양군(綾陽君)이종(李倧: 인조)을 추대하기로 합의였는데, 4촌 동생 이기축(李起築)이 능양군이종(李倧)과 서울의 같은 동네에 살아서 서로 친하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기축을 모의에 끌어들여 능양군과 서로 연락할 때마다 그를 파견하였던 것이다.[시장] 그러나 이기축이 4촌 형 이서의 <인조반정> 모의를 먼저 알아차리고 자진하여 협조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1634년(인조 12) 2월, 평안도 삭주 부사(朔州府使)에 임명되었다. 사폐(辭陛: 하직 인사)하는 날 인조가 이기축을 인견하고 그에게 궁시(弓矢)를 내려주며 술을 권하였는데, 이기축은 인조와 함께 옛날 일을 회고하면서, 사양하지 않고 술을 마시다가 몹시 취하여, 술주정을 하며 부축을 받고 나왔다. 승정원(承政院)을 지날 때, 승정원 아전이 수령(守令)이 지켜야 할 일곱 가지 일[守令七事]을 고하였으나, 이기축은 술에 취하여 아전을 꾸짖으며 대답하지 않고 나갔다.[시장] 사헌부 지평(持平)박수홍이 “이기축은 본래 미천한 서얼(庶孼) 출신으로서 술에 취해서 미친 듯이 날뛰며 제멋대로 굴었습니다. 삭주 부사에 임명되고 나서, 대신(大臣)에게 하직인사도 안하고 대간(臺諫)에게도 하직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엄하신 성상이 계시는 곳에서도 함부로 말하고 말투가 거칠었으니, 그의 교만하고 방자한 버릇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삭주는 멀리 떨어진 변방의 위태로운 지역이므로, 이기축이 부임하기 싫어서 일부러 그런 짓을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만약 그의 관직만 교체 임명하는 데 그친다면 그의 잔꾀를 이루어 줄 뿐이니, 속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고 아뢰었다.[『승정원일기』인조 12년 3월 10일] 대간(臺諫)에서 삭주 부사이기축을 논죄하자, 인조는 “내가 옛날부터 이 사람의 술주정[醉狂]을 잘 알고 있는데, 책망할 게 무엇이 있는가.”라며 윤허하지 않았으나, 대간에서 여러 달 동안 계속 탄핵하자, 인조가 부득이 이기축을 체직(遞職)시키고 그를 임금을 호위하는 금군장(禁軍將)에 임명하였다.[시장]

이기축은 4촌형 이서(李曙)가 죽은 뒤부터 항상 비감에 젖었고 세상일에 뜻을 잃었다. 벼슬을 사임한 후, 고향 양주(楊州) 송산리(松山里)로 돌아와 새 집을 짓고 조용히 만년을 보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쌀독에 끼니꺼리조차 떨어지는 때가 자주 있었다. 간혹 친척들이 가산(家産)을 돌보아 자손을 위한 계책을 마련하라고 권하였으나, 이기축은 “미천한 사람으로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살아난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어 2품(品)의 관직에 오른 것도 분에 넘치는데, 여기에다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만약 내 자손들이 어질다면, 비록 가산이 없더라도 스스로 살아갈 것이고, 어질지 못하다면 장차 세업(世業)을 지키지 못할 것이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탄식하며, 끝내 자손들을 위해 1묘(畝)의 땅도 마련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공신(功臣)을 책봉할 때 하사하는 땅과 노비도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녹봉 이외에는 수입이 없었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집안이 가난하고 찾아오는 사람조차 없었으므로 항상 쓸쓸하였다. 만년에 날마다 마을 친족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다가 돌아갔다. 이기축이 죽은 후, 그의 부고를 받은 인조는 그가 몹시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예조로 하여금 장례(葬禮)에 소용되는 모든 물품을 넉넉히 지급하게 하고, 또 3년 동안의 녹봉을 그 가족들에게 지급하도록 하였다.[시장] 인조가 돌아간 뒤에 효종과 현종도 인조의 뜻에 따라 녹봉을 지급하였으며, 숙종 때에도 그 부인에게 달마다 녹봉을 지급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묘소는 경기 양주(楊州) 송산리(松山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겸재(謙齋)조태억(趙泰億)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있다.[시장]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자손들이 나라에 시호(諡號)를 청하려고, 명곡(明谷)최석정(崔錫鼎: 최명길의 손자)에게 시장(諡狀)을 부탁하였다. 영의정최석정이 이기축의 시장을 지었으나, 자손들이 조정에 시호를 청하기 전에 최석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국법에는 시장을 지은 사람이 살아있지 않으면 예조에 시장을 청할 수가 없었으므로, 최석정의 제자인 조태억에게 다시 이기축의 시장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때 조태억은 스승 최석정의 글을 그대로 옮겨 싣고, 겨우 몇 자만 고쳤다고 한다.[시장]

부인 우씨(禹氏)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우종남(禹終男)의 딸인데, 자녀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만실(李萬實)은 완림군(完林君)을 습봉(襲封)하였고, 차남 이만식(李萬植)은 일찍 죽었다. 3남 이만수(李萬樹)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방답진 첨사(防踏鎭僉使)를 지냈고, 4남 이만림(李萬林)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평 부사(定平府使)를 지냈으며, 딸은 참봉(參奉)장상주(張相周)에게 시집갔다.[시장]

부인 우씨(禹氏)는 정숙한 부덕(婦德)이 있었고 내외가 금슬(琴瑟)이 아주 좋았는데, <정사공신(靖社功臣)>의 부인이라고 하여, 인조 때부터 여러 임금들이 늠료(廩料)를 하사하였고, 숙종 때에도 달마다 늠료를 지급하였다. 부인의 나이가 90세에 이르자, 예조에서 아뢰기를, “정사공신(靖社功臣)의 부인 중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자가 매우 드무니, 청컨대 1품의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증봉(增封)하소서.”하고 청하였으나, 대간(臺諫)에서 “부인은 남편의 관품을 따라야 하므로 불가합니다.”라고 반대하였다. 예조에서 여러 차례 증봉하기를 청하였으나, 숙종은 증봉하는 대신에 옷감과 음식물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부인 우씨는 남편 이기축이 죽은 뒤에도 53년을 더 살다가, 1698년(숙종 24) 노병으로 돌아가니, 향년 93세였다. 부인 우씨는 남편 이기축의 무덤 왼쪽에 합장되었다.[시장]

이기축의 누이동생은 형조 좌랑이경항(李慶恒)에게 시집갔다. 이경항은 처음에 소암(疎菴)임숙영(任叔英)에게 수학하였으나, 광해군 때 임숙영을 배반하고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문하(門下)에 드나들다가, 1620년(광해군 1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면서 성균관에 들어갔다. <인정반정> 직후, 성균관 유생들이 이경항은 이이첨의 제자라고 하여, 청금록(靑衿錄: 유생 명단)에서 그의 유적(儒籍)을 삭제하여버렸는데, 청금록에 삭제된 된 사람은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이때 이경항의 처남인 이기축이 4촌 형 이서(李曙)에게 이 일을 부탁하였는데, 총융사이서가 성균관 유생(儒生)들에게 청금록에서 이경항의 유적을 살리도록 편지를 보내 협박하였다. 1627년(인조 5) 결국 이경항이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청요직에 오르자, 사론(士論)에서 크게 분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경항은 이서의 도움을 받아 사헌부 감찰(監察), 형조·공조의 정랑(正郞)과 경상도·함경도 도사(都事) 등을 지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겸재집(謙齋集)』
  • 『명곡집(明谷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