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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54 기준 최신판




총론

[1497년(연산군 3)∼1562년(명종 17) = 66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知)·강원도관찰사(觀察使)이다. 명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자(字)는 도성(道盛)이고, 호(號)는 금강(錦江), 또는 어수(漁叟)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안도(永安道) 평사(評事)이목(李穆)이고, 어머니 예안 김씨(禮安金氏)는 형조 참판(刑曹參判)김수손(金首孫)의 딸이다. 좌의정정유길(鄭惟吉: 김상헌의 외조부)과 절친한 사이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16년(중종 11)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다. 1534년(중종 29)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8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대교(待敎)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고,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전임되었다가, 공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비문] 1537년(중종 32)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서, 1539년(중종 34)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전임되었으며, 그 해에 홍문관 교리(校理)로 임명되었다. 1540년(중종 35) 사헌부 장령(將令)이 되었고, 1541년(중종 36) 사헌부 장령으로서 구황적간어사(救荒摘奸御使)가 되어 황해도에 파견되었다. 1542년(중종 37)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서, 1543년(중종 38)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이때 당하관(堂下官)의 문신(文臣)이 참여한 제술(製述)시험에서 2등을 차지하면서 상으로 숙마(熟馬) 1필을 받고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으며, 1544년(중종 38)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승진되었다.(『중종실록』 38년 8월 11일)

명종 시대 활동

1545년(명종 즉위) 의정부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 1548년(명종 3) 홍문관 전한(典翰)으로서 구황을 살피기 위하여 황해도로 파견되었다.(『명종실록』 3년 2월 12일) 겨울에 특명(特命)으로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으며, 곧 이어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비문] 1549년(명종 4)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1550년(명종 4) 우승지(右承旨)를 거쳐서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1551년(명종 5)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전임되었다가,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 1552년(명종 7)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서,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1553년(명종 8) 조정으로 들어와 호조와 병조의 참의(參議)를 지냈다. (『명종실록』 8년 윤3월 8일) 1554년(명종 9)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나갔으며, 1556년(명종 11)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전임되었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노년에 상례(常禮)를 치르면서 얻은 병으로 신음하다가, 1562년(명종 17) 2월 29일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 66세였다.[비문]

성품과 일화

얼굴 모습은 마치 옥(玉)이나 눈처럼 아름답고 깨끗하였으며, 성품은 온화하고 후덕하며, 과묵하고 청렴하였다.

1497년(연산군 3) 이세장은 공주(公州)의 외갓집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과묵하였으며 욕심이 적었다. 그가 태어난 지 겨우 1년 정도 되었을 때,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는데, 이때 아버지 이목(李穆)도 사화의 중심인물인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참화(慘禍)를 당하였다.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영남 사림파(士林派) 김일손(金馹孫)은 스승인 점필재(佔畢齎)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기록하여,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중국 고사(故事)에 비유하여 은근히 비판하려다가,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에게 발각되면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였는데, 이세장의 아버지 이목도 김종직의 제자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반드시 사책(史冊)에 기록하려고 하다가, 이극돈과 유자광(柳子光)등 훈구파에 의하여 체포되어 참형(斬刑)을 당하고, 가산은 적몰(籍沒)되었다.

이세장은 아버지를 여의고 공주의 외갓집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외삼촌인 현감(縣監)김사창(金泗昌)이 고아가 된 어린 조카 이세장을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고 글을 가르쳤다. 그는 6, 7세 부터 글을 배웠는데, 일찍이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다. 이 때문에 안으로 학식(學識)을 간직하였으면서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니, 남들이 그의 학문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지 못하였다. 사실 그는 아버지 이목(李穆)이 과거에 장원 급제하면서 문명(文名)을 날렸으나, 사화(士禍)로 인하여 참변(慘變)을 당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았다.[비문]

1505년 5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였는데,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희생된 사람들은 대다수 신원(伸寃)되고 추증(追贈)되었으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희생된 사람들은 신원되고 복관(復官)되는 사람이 드물었다. 왜냐하면 <갑자사화>는 단순히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출(廢黜) 문제와 관련된 사화(士禍)로서, 연산군의 폐위가 곧 사안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무오사화>는 선왕인 세조의 왕위 찬탈로 야기된 정통성 문제와 관련된 사화였기 때문이다. 이에 이세장은 과거시험을 거쳐 관계로 진출하여, 아버지 이목의 신원과 추증을 왕에게 직접 호소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는 1516년(중종 11) 나이 20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는데,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519년(중종 14) 23세 때 성균관 유생으로서 중종에게 상소하여, <무오사화> 때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이목을 신원하고 추증(追贈)해 주도록 간청하였다. 이때 중종은 이를 가엾게 여겨 이목을 신원(伸寃)하고 복관(復官)하였으나, 추증(追贈)해 주지는 않았다. 1534년(중종 29) 그의 나이 38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이후, 도승지·강원도 관찰사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게 되면서, 아버지 이목(李穆)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그 후,인조 때 그 후손인 참장(參將)이기혁(李基赫)이 상언(上言)하면서 이목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증직(贈職)되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후덕하여 남을 대할 때, 모나게 행동한 적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에는 엄격하면서 법도가 있었고, 의로운 일을 보면 곧장 앞장서서 행하였는데, 생각이 흔들리거나 뜻을 굽힌 적이 없었다. 이치에 순응하여 정도(正道)를 지켰으며, 식견이 남들보다 서너 등급 정도가 높았다. 집안 살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여가에 술을 마시게 되면, 곧잘 거나하게 술에 취하였다. 이세장은 평소 검소하여 집안에는 세간이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네 벽만이 덩그렇게 있었다. 방바닥에는 짚을 깔고 생활하였으며, 목면(木棉)으로 지은 빛바랜 옛 갓옷 하나를 겨울이나 여름이나 바꿔 입지 않고 10년 동안이나 입고 다녔다. 임금이 법가(法駕)를 갖추어 거둥할 때, 시신(侍臣)들은 반드시 성대한 복식(服飾)을 입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세장은 도승지(都承旨)가 되었을 때에도 옛 갓옷을 그대로 입었지만 동료들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음식은 채소 반찬만을 먹으면서 담박한 생활을 하였으나 이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세장이 몸소 실천한 행적에 대해서 칭찬할 만한 점이 많지만, 하늘로부터 타고 난 것 같은 청렴결백함이 있었으므로, 그가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을 때, 사림(士林)의 여론(輿論)이 ‘뽑힐 만한 사람이 뽑혔다’고 흡족하게 여겼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처음에 예안 김씨(禮安金氏)의 선영(先塋)인 충청도 공주(公州) 서촌(西村)의 무성산(茂城山) 기슭에 있는 어머니 김씨의 무덤 아래에 있었다. 그 후, 경기도 통진현(通津縣) 여금산(餘金山) 기슭에 있는 아버지 이목(李穆)의 무덤 아래로 옮겼는데, 지금 경기도 김포 통진(通津)의 상포(霜浦)에 있다. 백헌(白軒)이경석(李景奭)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비문]

부인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정주 목사(定州牧使)양숙(梁淑)의 딸인데, 자녀는 5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이건(李鍵)은 병절 교위(秉節校尉)를 지냈고, 차남 이난(李鑾)은 부사과(副司果)를 지냈으며, 3남 이기(李錡)는 수의 부위(修義副尉)를 지냈다. 4남 이갱(李鏗)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5남 이철(李鐵)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장녀(長女)는 한성 참군(漢城參軍)정수후(鄭守厚)에게 시집갔고, 차녀(次女)는 종실(宗室)인 화릉정(花陵正) 이수혜(李秀蕙)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현령(縣令)구운한(具雲翰)에게 시집갔다.[비문]

손자 이구호(李久濠)는 문과에 급제하여 연서 찰방(延曙察訪)을 지냈는데, 장남 이건의 아들이다. 손자 이구원(李久源)은 문과에 급제하여 중추부 첨지사(簽知事)를 지내고,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랐는데, 4남 이갱의 아들이다. 손자 이구징(李久澄)은 문과에 급제하여 중추부 지사(知事)를 지냈는데, 5남 이철의 아들이다. 이구징은 증조부 이목(李穆)의 훌륭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과 계곡(溪谷)장유(張維)에게 부탁하여 묘비(墓碑)와 묘지명(墓誌銘)을 지어서 그 무덤 앞에 세웠으며, 청송 군수(靑松郡守)로 있을 때 조부 이세장이 편집한 이목의 문집 『이평사집(李評事集)』을 간행하였다. 4남 이갱의 셋째 딸이 능해군(綾海君)구성(具宬: 인조의 외삼촌)에게 시집가서 구인후(具仁垕)를 낳았는데, 구인후는 신경진(申景禛) 등과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획하여 마침내 반정을 성공시키면서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청음집(淸陰集)』
  • 『이평사집(李評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