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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5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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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의전 |
한글표제 | 이의전 |
한자표제 | 李義傳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의중(宜仲) |
봉작 | 완선군(完善君)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8년(선조 1) 11월 23일 |
사망 | 1647년(인조 25) 7월 22일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경기 금천(衿川) 한천동(寒泉洞) 관감당(觀感堂) |
묘소소재지 | 경기 금천현(衿川縣) 한천동(寒泉洞)의 선영(先塋)-지금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
증조부 | 이표(李彪) |
조부 | 이억재(李億載) |
부 | 이원익(李元翼) |
모_외조 | 연일정씨(延日鄭氏); 정추(鄭樞)의 딸 |
처_장인 | 순흥안씨(順興安氏); 안굉(安宏)의 딸→(자녀) 3남 3녀 |
자녀 | (1자)이수약(李守約) (2자)이수기(李守紀) (3자)이수강(李守綱) (1녀)허목(許穆)의 처 (2녀)윤극화(尹克和)의 처 (3녀)이경수(李慶需)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의전(李義傳)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20일, 『인조실록』 4년 2월 14일 |
총론
[1568년(선조 1)∼1647년(인조 25) = 80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철원 부사(鐵原府使)·양근 군수(楊根郡守)이고, 봉작(封爵)은 완선군(完善君)이다. 자(字)는 의중(宜仲)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경기 금천(衿川) 한천동(寒泉洞) 관감당(觀感堂)이다.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이원익(李元翼)이고, 어머니 연일정씨(延日鄭氏)는 현신 교위(顯信校尉) 정추(鄭樞)의 딸이다. 익녕군(益寧君: 태종의 제 11왕자)이치(李礻+多)의 5대손이고, 미수(眉叟)허목(許穆)의 장인이다.
광해군·인조 때 4현(縣), 5군(郡), 2부(府)를 합해서 도합 11고을의 목민관(牧民官)을 40여 년간 지냈는데, 목민관으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왜란(倭亂)>·<호란(胡亂)> 이후 도탄에 빠진 민생(民生)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음율(音律)에 정통하였는데, 아버지 이원익처럼 거문고를 잘 탔다.
광해군 시대 활동
과거에 거듭 실패한 후, 선조 말년에 음직으로 몇 고을의 현감(縣監)을 거쳐, 광해군 초기에 양성 현감(陽城縣監)이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 암행어사박사제(朴思齊)가 양성 현감이의전의 치적이 도내에서 으뜸이라고 보고하자, 광해군이 이의전의 품계를 올려 당상관(堂上官)으로 삼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이의전의 아버지인 이원익(李元翼)이 영의정이 되었으나, 대북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고, 영의정이원익을 탄핵하는 상황이었으며, 대북(大北)의 사주를 받은 대간(臺諫)에서 이의전의 승품까지도 반대하였으므로 그는 다시 당하관으로 강등되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20일) 영의정이원익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강원도 홍천(洪川)으로 유배되자, 이의전도 벼슬에서 쫓겨났다. 광해군 말기에 다시 풍덕 군수(豊德郡守)가 되었는데, 1618년(광해군 10) 10월 그의 부인 안씨(安氏)가 돌아갔다. [『청음집(淸陰集)』 8권]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아버지 이원익이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은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인조를 공주(公州)까지 호종하였는데, 반란이 진압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여주(驪州) 에 은거하였다. 1626년(인조 4) 이원익이 다시 조정에 나오자, 인조는 “경이 과인을 버리지 않고 이제 조정에 다시 들어왔으니, 나의 마음이 오직 기쁠 뿐이다.”라고 하면서 “전 군수이의전을 서용(敍用)하여 가까운 곳에 수령으로 임명하라”고 명하였다.(『인조실록』 4년 2월 14일) 이에 1625년(인조 3) 이의전은 경기 양근 군수(楊根郡守)에 임명되었다. 포도청에서 “양근 군수이의전이 도적 천룡(天龍) 등 7명을 붙잡아 서울로 올려 보냈습니다.”라고 보고하니, 인조는 이의전을 가자(加資)하도록 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3년 9월 26일] 창석(蒼石)이준(李埈)이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양근군을 지날 때 “맑은 기운이 사람을 엄습하구나.”라고 하며 그의 선정(善政)에 감탄하였다. 이에 이준은 이의전의 치적이 도내에서 으뜸이라고 보고하였고, 인조는 표리(表裡: 옷감의 겉감과 안감)를 하사하고,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하였다.
1626년(인조 4) 철원 군수(鐵原郡守)가 되었는데, 늙은 아버지 이원익을 가까이에서 모시지 못한다고 하여 사직하기를 간청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다. 후금(後金)의 오랑캐 군사의 대규모 침공으로 평안도와 황해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고, 아버지 이원익은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전주(全州)로 내려가서 분조(分朝)를 이끌었다. 도원수(都元帥)장만(張晩)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의 오랑캐 군사와 싸우다가 패하자, 평산(平山)에서 군사를 거두어 철원부(鐵原府)로 후퇴한 후, 제장(諸將)들을 모아 후금의 오랑캐와 다시 싸울 계획을 세웠다. 이때 철원 군수이의전은 철원의 관군을 동원하여 척후(斥候)를 삼엄하게 하고 도원수의 군사들에게 식량을 조달하여 군민(軍民)들을 안정시켰다.[비문] 황주(黃州)를 점령한 후금은 사신을 강화도에 보내 화의를 교섭하였다. 결국 후금과 화친을 하게 된 조선은 후금과 형제 국가가 되었고, 명나라와는 교류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후금의 군사가 철수한 후, 도원수장만은 후금의 오랑캐를 막지 못하였다고 하여 부여로 유배되고, 아버지 이원익은 나이가 많다며 관직을 사임하고 금천(衿川)으로 낙향하였다. 이때 인조는 철원 부사이의전과 이천 부사(利川府使)신해(申垓)의 임지를 서로 바꾸어 이의전이 가까운 곳에서 아버지를 모시도록 조처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5년 12월 4일]
1628년(인조 6) 이천 부사이의전은 <인조반정>의 공신(功臣)들이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회맹제(會盟祭)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왔다. 1629년(인조 7)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어 중앙의 고위 무관직을 맡게 되었는데. 인조가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하였다. 1630년(인조 8) 인조는 이의전을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시켜 다시 양근 군수(行楊根郡守)에 임명하였는데, 이것은 아버지 이원익의 노병을 간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8년 1월 28일] 1634년(인조 12) 1월 29일, 이원익이 노병(老病)으로 금천(衿川) 오리(梧里)의 관감당(觀感堂)에서 돌아갔는데, 향년 88세였다. 이에 이의전은 금천(衿川)의 선영(先塋)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이의전은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扈從)하여, 45일 동안 청나라 오랑캐와 싸웠다. 1637년(인조 15) 중추부 첨지사(簽知事)에 임명되었으며, 아버지 봉작을 습봉(襲封)하여 완선군(完善君)에 봉해졌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5년 8월 8일]
1638년(인조 16) <병자호란>이후 경기 지방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는 이의전이 아니면 민심을 수습할 수 없다고 하여, 그를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시켜 가평 군수(嘉平郡守)에 임명하였다. 이에 이의전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2품의 품계에 올라 마침내 대신(大臣)이 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70세가 넘었다고 하여 치사(致仕)하고 고향 금천(衿川)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봉조하(奉朝賀)에 임명하여, 조정에 의식이 있을 때에는 서울에 올라와서 의식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만년에 금천(衿川) 오리(梧里)의 관감당(觀感堂)에서 살았는데, 80세 때에는 수구(壽耉: 장수하는 노인)라고 하여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1647년(인조 25)에 7월 22일, 중풍(中風)으로 금천 관감당에서 돌아갔는데, 향년 80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간이(簡易)하고 조촐하였으며, 행동이 담박하고 사치하지 않았다.[비문]
착한 사람을 보면, 마치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할 듯이 좋아하였으며, 악(惡)한 사람을 보면, 자기 몸을 더럽힐 듯이 미워하였다. 이의전은 아버지 영의정이원익의 곁에 있을 때, 나라에서 하사한 물품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아우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자기 몫은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그는 성품이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지방의 수령관으로 있을 때, 일이 없는 날에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그는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독서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면 번거롭지 않고 일이 저절로 잘 된다.”고 하였다. 그는 책을 많이 읽어서 고사(古事)에 두루 정통하였는데, 학문을 논할 때에는 고사를 많이 인용하였으므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많았다.[비문]
아버지 영의정이원익(李元翼)은 맏아들 이의전에게 목민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德目)에 대하여 “청렴하면 일이 공정하고, 공정하면 사리가 분명해진다. 정치를 하는 데에는 백성들에게 어질고 물건을 아껴야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호령(號令)이 공평하면서도, 상벌(賞罰)에 사정(私情)이 없으면 백성들이 순종할 것이다. 민심(民心)이 흩어지면 만사(萬事)가 잘못된다.”라고 훈계하였는데,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청렴하고 공정하게 정사를 베풀어 가는 곳마다 민심을 얻었다.[비문]
이의전은 비록 과거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고관대작(高官大爵)에 이르는 정통 코스를 밟지는 못하였으나, 음직(蔭職)으로 11고을의 목민관(牧民官)을 지내면서 고을의 오래된 폐단을 개혁하고, 아전들의 횡포를 막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개선하였다. 아버지 이원익이 조정의 재상으로서 국가의 중대한 정책을 수립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아들 이의전은 지방의 수령관으로서 나라의 정책을 수행하였다. 이원익은 아들 이의전에게 “지방의 목민관(牧民官)도 조정의 정승·판서만큼 중요한 직책이다.” 라고 하면서, 음직(蔭職)으로 지방의 현감(縣監)과 군수(郡守)로 나가기를 권하였는데, 이의전은 지방의 수령관으로 나가 부사(府使)에 이르렀고, 품계도 종2품의 자급(資級)에 올라 대신(大臣)이 되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이의전의 가문(家門)은 장수하는 집안으로 소문이 났는데, 5대조 익녕군(益寧君: 태종의 아들)이치(李礻+多)가 80여 세에 돌아갔고, 고조부 수천군(秀川君)이정은(李貞恩)이 87세에 돌아갔으며, 증조부 청기군(靑杞君)이표(李彪)는 83세에 돌아갔고, 조부 함천군(咸川君)이억재(李億載)는 84세에 돌아갔으며, 아버지 문충공(文忠公)이원익(李元翼)이 88세에 돌아갔고, 본인 이의전(李義傳)은 80세에 돌아갔으며, 맏아들 이수약(李守約)은 광흥창(廣興倉) 수(守)를 치사(致仕)한 지 6년만인 79세에 세상을 떠났는데,[『기언 별집』 17권 「이수약 묘지」] 모두 7대에 걸쳐 수고(壽考: 장수)하여 무려 2백 70여 년간이나 계속되었다.”라고 하였다.[비문]
이의전은 음악에 아주 정통하였는데,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그의 가문은 누구나 하나의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것이 조상 대대로 전해내려 오는 전통이었는데, 그 내력이 상당히 오래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영의정이원익은 언제나 이의전에게 고조부 수천군(秀川君)이정은(李貞恩)의 거문고 타는 것[鼓琴]과 조부 함천군(咸川君)이억재(李億載)의 경돌 치기[擊磬]를 칭송하고 격찬하였다. 조부 함천군(咸川君)이억재(李億載)는 아주 음률(音律)에 정통하였는데, 사기(沙器) 그릇에 물을 담고 나뭇가지를 가지고 물그릇을 쳐서 높고 낮은 소리를 내었는데, 그 소리가 맑고 밝게 울려 퍼지자,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원래 이원익의 집은 낙산(駱山) 아래에 있어서 거문고를 가지고 자주 산에 올라가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불렀는데, 옛 사람의 악부(樂府)까지도 소리의 장단(長短)과 고저(高低)가 모두 곡조에 맞았다고 한다. 이의전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이원익에게 거문고를 타는 법을 배워 오음(五音)·육률(六律)의 변화를 잘 알았는데,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 곧잘 거문고를 탔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종신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금천현(衿川縣) 한천동(寒泉洞)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미수(眉叟)허목(許穆: 맏사위)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비문] 지금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
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통사랑(通仕郞)안굉(安宏)의 딸인데, 자녀는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이수약(李守約)은 종친부 전첨(典籤)·광흥창(廣興倉) 수(守)를 지냈고, 차남 이수기(李守紀)는 한성부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3남 이수강(李守綱)은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냈다. 장녀는 우의정허목(許穆)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윤극화(尹克和)에게, 3녀는 이경수(李慶需)에게 각각 시집갔다.[비문]
부인 안씨(安氏: 허목의 장모)는 아버지 안굉(安宏)이 일찍 죽자, 외가에서 자랐는데, 어머니가 바로 형조 판서이노(李輅)의 누이였다. 부인 안씨는 장중(莊重)하고 말이 적었으며, 남들에게 스스럼없이 대하였다. 친족에게 어질고 후하였으며, 노복(奴僕)들에게 믿음이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마음을 다하게 하였다. 이의전이 풍덕 군수(豊德郡守)로 있을 때 부인 안씨가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1618년(광해군 10) 10월 30일이었다. 이때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만사(輓詞)를 지어 부인 안씨의 죽음을 애도하였다.[『청음집(淸陰集)』 8권]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미수기언(眉叟記言)』
- 『기언별집(記言別集)』
- 『목민심서(牧民心書)』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오리집(梧里集)』
- 『동사록(東槎錄)』
- 『이재유고(頤齋遺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