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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대표표제=숙의이씨|한글표제=숙의이씨|한자표제=淑儀李氏|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왕족/후궁|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성종~중종|집필자=홍연주|자=|호=|봉작=숙의(淑儀)|시호=|출신=왕족|성별=여자|출생=|사망=|본관=양성(陽城)|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증조부=이맹상(李孟常)|조부=이순지(李純之)|부=이공(李拱)|모_외조=봉화 금씨(奉化琴氏) : 금이간(琴以間)의 딸|형제=|처_장인=(남편)연산군(燕山君) →(자녀)1남|자녀=(1자)양평군(陽平君) 이성(李誠)|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443|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ka_10801007_003 『중종실록(中宗實錄)』 8년 1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801007_004 『중종실록』 8년 1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208010_005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12년 8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9008_002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10년 9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09005_012 『중종실록』 1년 9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09005_005 『중종실록』 1년 9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09024_003 『중종실록』 1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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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 = ?]. 조선의 10대 왕인 연산군(燕山君)의 후궁. 본관은 양성(陽城)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공(李拱)이고, 어머니는 봉화 금씨(奉化琴氏)금이간(琴以間)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세종(世宗)대 천문학자로 활동한 이순지(李純之)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를 지낸 이맹상(李孟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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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中宗)의 후궁.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섬시(司贍寺) 첨정(僉正)을 지낸 이형신(李亨臣)이며, 다른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연산군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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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후궁'''==
  
이숙의(李淑儀)는 어려서 소혜왕후(昭惠王后)의 시녀로 입궁하였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1498년(연산군 4)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아들 양평군(陽平君)이성(李誠)을 낳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801007_003 『중종실록(中宗實錄)』 8년 1월 7일]),([http://sillok.history.go.kr/id/kka_10801007_004 『중종실록』 8년 1월 7일]) 그리고 1506년(연산군 12) 숙원(淑媛)에 봉해졌다가,([http://sillok.history.go.kr/id/kja_11208010_005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12년 8월 10일]) 이후 숙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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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원(李淑媛)이 어떻게 입궁을 하여 중종의 후궁이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1524년(중종 19) 중종과의 사이에서 아들 덕양군(德陽君)을 낳았는데, 덕양군이 어렸을 때 이숙원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이기묘지명(李岐墓誌銘)] 중종 사망 후 종2품 숙의(淑儀)로 진봉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7 「중종조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현재 남겨진 기록을 보면 이숙원 본인의 행적보다는 그녀의 가족들과 관련된 내용들이 더 많다. 연산군 대에 이숙의의 오빠였던 이칭수(李稱壽)가 경기심약(京畿審藥)의 임기가 만료된 후에도 계속해서 그 지위에 잉임(仍任)되었던 일,([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9008_002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10년 9월 8일]) 고안정(高安正)이라는 관리가 이숙의의 아우를 첩으로 삼아 그 세력을 믿고 폐해를 저질렀다는 기록이[『중종실록』중종 2년 8월 9일 5번째기사] 것으로 보아 이숙의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언제 숙의로 봉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선원록(璿源錄)』과 『중종실록』 8년의 기록에는 숙의로 기록되어 있다. 이숙의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후 폐서인되어 사제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되며,([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09005_012 『중종실록』 1년 9월 5일])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묘소와 후손'''==
 
=='''묘소와 후손'''==
  
이숙의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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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원의 무덤은 본래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에 있었는데 1981년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궁내동으로 이장하였다. 비신의 뒷면에는 1719년(숙종 45) 5대손 이무(李楙)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재직 시 묘표를 다시 세웠다는 짧은 기사만 있을 뿐, 음기(陰記)는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이숙의는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1남을 두었는데, 양평군이성이다. 양평군은 어려서 이숙의의 아버지 이공의 외사촌인 이손(李蓀)의 집에서 지냈다. 중종반정 이후 수안(遂安)으로 유배되었다가([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09005_005 『중종실록』 1년 9월 5일]) 1506년(중종 1) 9월 24일 폐세자 이황과 함께 사사(賜死)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09024_003 『중종실록』 1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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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원은 중종과의 사이에서 1남 덕양군이기(李岐)를 낳았다. 덕양군은 호조 판서(判書)권찬(權纘)의 딸과 혼인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la_10101024_003 『인종실록』 1년 1월 24일]) 어머니를 일찍 여읜 후 중종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복형제인 인종(仁宗)과 명종(明宗)과도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진다.[『국조인물고』「이기묘지명」]
  
 
=='''참고문헌'''==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인종실록(仁宗實錄)』       
*『중종실록(中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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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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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김범, 『연산군』, 글항아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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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미선, 「조선시대 후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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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성남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성남시, 2001.       
*지두환, 『연산군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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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53 판




총론

[?~? = ?].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中宗)의 후궁.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섬시(司贍寺) 첨정(僉正)을 지낸 이형신(李亨臣)이며, 다른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중종의 후궁

이숙원(李淑媛)이 어떻게 입궁을 하여 중종의 후궁이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1524년(중종 19) 중종과의 사이에서 아들 덕양군(德陽君)을 낳았는데, 덕양군이 어렸을 때 이숙원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이기묘지명(李岐墓誌銘)」] 중종 사망 후 종2품 숙의(淑儀)로 진봉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7 「중종조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묘소와 후손

이숙원의 무덤은 본래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에 있었는데 1981년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궁내동으로 이장하였다. 비신의 뒷면에는 1719년(숙종 45) 5대손 이무(李楙)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재직 시 묘표를 다시 세웠다는 짧은 기사만 있을 뿐, 음기(陰記)는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이숙원은 중종과의 사이에서 1남 덕양군이기(李岐)를 낳았다. 덕양군은 호조 판서(判書)권찬(權纘)의 딸과 혼인하였다.(『인종실록』 1년 1월 24일) 어머니를 일찍 여읜 후 중종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복형제인 인종(仁宗)과 명종(明宗)과도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진다.[『국조인물고』「이기묘지명」]

참고문헌

  • 『인종실록(仁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성남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성남시,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