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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1:2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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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저승전 |
한글표제 | 저승전 |
한자표제 | 儲承殿 |
상위어 | 동궁(東宮), 창덕궁(昌德宮) |
관련어 | 세자(世子), 세자궁(世子宮), 춘궁도감(春宮都監)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 |
집필자 | 신지혜 |
건립시기/일시 | 1485년(성종 16) |
장소 | 창덕궁 동궁(東宮) |
규모(정면/측면/칸수) | 28칸(동온돌 6칸, 서온돌 6칸, 대청마루 16칸) |
관련 인물 |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저승전(儲承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14년 2월 6일, 『성종실록』 16년 2월 4일, 『성종실록』 16년 2월 11일, 『영조실록』 40년 12월 18일, 『영조실록』 32년 5월 1일 |
창덕궁 동궁의 중심 건물.
개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에 창건되었으며, 동궁이 조성된 것은 1485년(성종 16)의 일이다. 저승전은 창덕궁 동궁의 중심 건물로 창덕궁에 동궁을 조성할 당시에 건립되었다. 1476년(성종 7), 훗날 연산군이 되는 원자가 태어나고 1483년(성종 14)에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에서 세자 책봉식을 거행하자 세자의 거처할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성종실록』 14년 2월 6일). 따라서 1485년(성종 16)에 세자궁을 짓도록 하고 왕이 직접 건양문(建陽門) 밖에 나가 동궁의 터를 살폈다고 한다(『성종실록』 16년 2월 4일).
저승전이 위치한 터는 원래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머물렀던 광연전(廣延殿)이 있었던 곳이다. 성종은 창덕궁에 동궁을 조성하는 일에 매우 관심을 기울였다. 동궁의 터를 직접 살피고, ‘세자궁영선소’를 조직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1485년 2월 11일에는 ‘춘궁조성도감(春宮造成都監)’으로 승격하여 공사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성종실록』 16년 2월 11일). 이후 수시로 춘궁도감(春宮都監)에 거둥하여 춘궁의 건설을 살폈다고 한다. 그러나 가뭄이 계속되자 공사가 미루어져 1487년(성종 18)에야 동궁이 완공되었다.
춘궁을 지을 때 필요한 재목과 기와의 대다수는 창경궁 공사 후 남은 것으로 사용하였다. 기둥은 300개 남짓을 사용하였고, 그 역사(役事)는 7개월가량 소요됐다고 한다. 창경궁은 1,000개도 넘는 기둥을 사용하였고 두 번의 겨울과 여름[寒暑]을 지나 완공되었기 때문에, 창경궁 역사에 비하면 작다고 할 수 있지만 궁궐 내 일반 전각에 비해 규모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은 수시로 공사현장을 찾을 정도로 동궁의 건립에 관심이 높았다. 연산군은 그곳에서 11년 10개월 동안 세자위에 있었다.
위치 및 용도
저승전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궁궐지(宮闕志)』에 ‘건양문 밖에 있는 옛 구현전(求賢殿), 광연정(廣延亭)의 터에 위치했다.’라고 적혀 있다. 저승전 앞에는 연못이 있으며 남쪽에 시민당(時敏堂)이 위치하고, 동쪽에 낙선당(樂善堂)·경극당(敬極堂)·양생각(陽生閣)·양정각(養正閣)이 있으며 북쪽에는 숭경당(崇慶堂)이 있다고 하였다.
저승전은 창덕궁 동궁의 중심 건물로써 왕세자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왕세자의 자리가 비어 있을 경우 대비 혹은 왕이 이어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왕세자의 존속 기간이 비연속적인 반면, 동궁의 영역은 궁궐에서 독립적으로 조성되어 있었으며 그 규모가 왕 혹은 대비 등이 거처하기에 적합한 규모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이나 대비의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궁궐에 문제가 있을 때 잠시 이어하는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1683년(숙종 9)에 현종 비 명성왕후(明聖王后)는 건강이 악화되자 저승전으로 이어하였으며, 명성왕후는 그곳 서별당(西別堂)에서 승하하였다.
변천 및 현황
저승전은 1485년에 창덕궁 동남쪽 건양문 밖에 조성되었다. 성종 연간에 조성된 저승전 일곽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때 중건되었다. 또다시 인조반정으로 창덕궁 내전이 소실되면서 동궁의 처소도 대부분 소실되었다.
1647년(인조 25)에 창덕궁의 내전과 편전을 복구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던 8월 15일, 도감에서는 세자를 위하여 전(殿) 하나와 당(堂)을 하나 짓기를 청하였다. 당시 세자가 임시로 거처하는 곳에서 흉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세자는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이었다. 1646년(인조 24)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봉림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었던 것이다. 이때 인경궁의 동궁을 헐어 창경궁에 옮겨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9월에 입주상량이 이루어졌으나 창덕궁의 다른 수리 공역이 끝난 후에도 저승전 공사는 지체되면서 동절기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공사는 이듬해 2월에 다시 시작하여 4월에 완성되었다.
저승전 공역은 처음에는 창덕궁 수리도감이 맡아 하였으나, 창덕궁의 공사가 끝나자 1648년에 따로 도감이 설치되었다. 저승전 공역도 창경궁·창덕궁 공사와 마찬가지로 인경궁의 일부 전각을 뜯어 사용하였다. 인경궁의 승화전(承華殿) 45칸과 주변 행각, 월랑 등을 철거하여 저승전 28칸, 즉 동온돌 6칸, 서온돌 6칸, 대청마루 16칸으로 조성하였으며 경극당 10칸, 낙선당 5칸을 함께 조성하였다.
1764년(영조 40)에 화재로 저승전이 소실된 후(『영조실록』 40년 12월 18일) 재건되지 않아 현재는 그 위치조차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조선전기 창덕궁의 동궁은 저승전과 낙선당, 시민당이 주 건물이었으나, 낙선당은 1756년(영조 32)에 소실되었다(『영조실록』 32년 5월 1일). 저승전은 1764년에 화재로 소실된 후 복구되지 않았으며, 1780년(정조 4) 7월에 시민당까지 화재로 소실되어 창덕궁의 동궁 영역이 거의 사라졌다. 이후 1784년(정조 8)에 중희당(重熙堂)을 건립함으로써 창덕궁 동궁에 변화가 생겨났다.
형태
1764년에 화재로 소실된 이후 재건되지 않아 건물에 대한 상세한 모습을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신지혜, 「17~18세기 경희궁 동궁의 건축특성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 이효석, 「조선시대 세자의 궁궐 공간 사용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