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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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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삼성당 |
한글표제 | 삼성당 |
한자표제 | 三聖堂 |
동의어 | 삼성사(三聖祠), 삼성묘(三聖廟) |
관련어 | 단군(檀君), 환인(桓因), 환웅(桓雄) |
분야 | 문화/종교/민간신앙 |
유형 | 건축·능·원·묘 |
집필자 | 서영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삼성당(三聖堂)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0년 6월 14일 |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는, 환인·환웅·단군을 모시는 사당. 삼성사 또는 삼성묘(三聖廟)라고도 함.
내용
『삼국유사』나 『제왕운기』 등이 전하는 단군신화에 의하면, 환인(桓因)은 단군의 할아버지, 환웅(桓雄)은 단군의 아버지이다. 이들을 모신 사당이 구월산(九月山)에 있는 것은 단군이 마지막 도읍한 곳인 동시에 산신으로 좌정한 곳이기 때문이다. 삼성사(三聖祠)가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에는 기우제 등을 거행하는 민속종교의 신당으로 이미 존재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로 이어졌고, 삼성사가 퇴락하면 문화현의 현령이 중창이나 보수에 앞장섰다. 조선 왕조에서는 단군이 우리나라의 개국시조라 하여, 1431년(세종 11) 평양에 새로 단군묘를 건립하여 국가에서 제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까지 삼성사는 국가 제사의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조선 왕조의 공식적 입장은 단군이 직접 하늘에서 내려와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이며, 때문에 신화적 존재에 불과한 환인과 환웅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 때부터 문화현을 중심으로 황해도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였는데, 그 원인이 삼성사를 공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고, 전염병이 성종 때까지 계속되면서 소문은 더욱 확산되었다. 마침내 1472년(성종 3) 황해도관찰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삼성사를 국가 제사에 포함시켜 평양의 단군묘와 동등하게 제사하도록 했다. 즉 국가 제사 가운데 중사(中祀)에 편입시켜 연 2회, 2월과 8월에 길일을 택해 제사하도록 했으며, 제사 때에는 중앙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제사와 관련된 제반 사항, 예컨대 제기의 수자나 제복(祭服) 등은 1789년(정조 13)에 상세히 규정되었다.
삼성당(三聖堂)은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주실에는 환인을 북쪽, 환웅을 동쪽, 단군을 서쪽에 모셨다. 이들은 처음에는 나무로 신상을 만들어 모셨으나 태종 때 신상을 위패로 대체했다. 위패는 흙으로 만든 것 같으며, 1765년(영조 41)에는 나무로 뚜껑을 만들어 위패를 보호했다. 그리고 서쪽 작은방에는 구월산대왕·토지정신(土地精神)·사직사자(四直使者)를 모셨다.
삼성당은 구월산을 벗어난 적은 없었지만 시기에 따라 약간의 위치 변동이 있었다. 즉 처음에는 구월산의 봉우리 중 하나인 대증산(大甑山)에 있다가 패엽사란 절 아래 작은 봉우리로, 다시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겼다고 한다. 각각의 이동 시기는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현재의 위치인 소증산으로의 이전은 조선초기 이전으로 짐작된다.
삼성당은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羅喆)이 일제의 학정을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용례
嶺之腰有神堂焉 不知創於何代 北壁檀雄天王 東壁檀因天王 西壁檀君天王 文化之人常稱三聖堂 其山下居人 亦稱曰聖堂里(『세종실록』 10년 6월 14일)
참고문헌
- 『춘관통고(春官通考)』
- 강만길, 「이조시대의 단군숭배」, 『이홍직박사회갑기념 한국사학논총』, 신구문화사, 1969.
- 김성환, 「구월산의 전승」, 『고려시대의 단군전승과 인식』, 경인문화사, 2002.
- 허흥식, 「구월산의 삼성사와 패엽사」, 『한국 신령의 고향을 찾아서』, 집문당, 2006.
- 박진욱·안병찬, 「구월산의 단군사터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1994-3, 과학백과사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