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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중(朴弘中)은 1600년(선조 3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 박홍중(朴弘中)은 1600년(선조 3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 ||
− | 1609년(광해군 1) [[참봉(參奉)]]과 사산현감(四山縣監)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세자익위사 세마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사화(癸丑士禍)>가 일어나자 [[김제남( | + | 1609년(광해군 1) [[참봉(參奉)]]과 사산현감(四山縣監)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세자익위사 세마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사화(癸丑士禍)>가 일어나자 [[김제남(金悌男)]] · 이원익(李元翼) · 남이공(南以恭) · 정택뢰(鄭澤雷) 등을 변호하고, [[폐모론(廢母論)]]을 일으킨 이이첨(李爾瞻) · 윤인(尹訒) · 정조(鄭造) · 이위경(李衛卿) 등의 탄핵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무옥(誣獄)으로 판명되면서, 인조 때 다시 관직에 기용되었다. 그는 [[풍수(風水)]]에 뛰어나서, 1630년(인조 8) 3월 [[의정부(議政府)]][[우의정(右議政)]]이정구와 함께 선조의 능인 [[목릉(穆陵)]]을 살피기도 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8년 3월 14일] 그리고 이듬해인 1631년(인조 9) 10월에는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9년 10월 10일] 저서로는 『추산집(秋山集)』이 있다. |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무옥(誣獄)으로 판명되면서, 인조 때 다시 관직에 기용되었다. 그는 [[풍수(風水)]]에 뛰어나서, 1630년(인조 8) 3월 [[의정부(議政府)]][[우의정(右議政)]]이정구와 함께 선조의 능인 [[목릉(穆陵)]]을 살피기도 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8년 3월 14일] 그리고 이듬해인 1631년(인조 9) 10월에는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9년 10월 10일] 저서로는 『추산집(秋山集)』이 있다. |
2018년 1월 9일 (화) 22:4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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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홍중 |
한글표제 | 박홍중 |
한자표제 | 朴弘中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자건(子建) |
호 | 추산(秋山)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82년(선조 15) |
사망 | 1646년(인조 24) |
본관 | 경주(慶州) |
증조부 | 박호겸(朴好謙) : 호조참의(戶曹參議) |
부 | 박희룡(朴熙龍) |
모_외조 | 평산 신씨(平山申氏):신복경(申福慶)의 딸 |
저술문집 | 『추산집(秋山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홍중(朴弘中) |
총론
[1582년(선조 15)~1646년(인조 24) = 65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 등을 지냈다. 자는 자건(子建)이고, 호는 추산(秋山)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박희룡(朴熙龍)이고,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교관(敎官)신복경(申福慶)의 딸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호조 참의(參議)를 지낸 박호겸(朴好謙)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당시의 명사들인 이정구(李廷龜) · 이식(李植) · 이항복(李恒福) · 서성(徐省) · 김상헌(金尙憲) 등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박홍중(朴弘中)은 1600년(선조 3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참봉(參奉)과 사산현감(四山縣監)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세자익위사 세마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사화(癸丑士禍)>가 일어나자 김제남(金悌男) · 이원익(李元翼) · 남이공(南以恭) · 정택뢰(鄭澤雷) 등을 변호하고, 폐모론(廢母論)을 일으킨 이이첨(李爾瞻) · 윤인(尹訒) · 정조(鄭造) · 이위경(李衛卿) 등의 탄핵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무옥(誣獄)으로 판명되면서, 인조 때 다시 관직에 기용되었다. 그는 풍수(風水)에 뛰어나서, 1630년(인조 8) 3월 의정부(議政府)우의정(右議政)이정구와 함께 선조의 능인 목릉(穆陵)을 살피기도 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8년 3월 14일] 그리고 이듬해인 1631년(인조 9) 10월에는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9년 10월 10일] 저서로는 『추산집(秋山集)』이 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계곡집(谿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