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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1:20 기준 최신판



1654년(효종 5)에 장렬왕후를 위해 새롭게 조성한 창덕궁의 대비전.

개설

수정전은 원래 창덕궁 후원에 인접하여 위치한 수정당(壽靜堂)이었다. 1794년(정조 18) 12월에 대비의 존호를 올리면서 책보(冊寶)와 책인(冊印)을 올리는 행사를 하기 위한 장소로 수정당을 명하였다. 그리고 전각의 명칭을 그에 부합하는 위계로 수정전이라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정조실록』 18년 12월 18일).

위치 및 용도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 뒤편으로, 집경당(集慶堂)과 경훈각(景薰閣)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조전은 창덕궁에서 왕의 정침이며, 그 뒤편으로 있는 집경당은 1667년(현종 8)에 현종의 어머니 인선왕후(仁宣王后)를 위해 경덕궁의 집희전(集禧殿)을 옮겨 지은 것이다. 수정당은 1654년(효종 5)에 증축하여 당시 대비였던 장렬왕후(莊烈王后)가 머물도록 하였다. 이후 정조 연간에 대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이곳을 거처로 삼았으며, 대비전에 존호를 올리는 의식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변천 및 현황

수정당은 광해군대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의 여러 전각이 소실될 때에도 남아 있었다. 창덕궁 후원에 가까이 있어 효종 연간까지 ‘유완지소(遊玩之所)’라 하여 후원의 경치를 관람하고 휴식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효종실록』 5년 2월 10일).

1654년에 대비였던 장렬왕후를 위해 건물을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대비전으로 활용하였다. 장렬왕후는 당시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 머물고 있었으나 자주 몸이 아팠다. 효종은 과거에 창덕궁과 창경궁 내전에서 더러운 물건들이 발굴되면서 여러 전각의 벽과 온돌 및 전돌 등을 교체하는 대규모 수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비의 건강이 좋지 않자 전각을 옮기는 것을 고민하였다. 마땅히 대비를 모실 만한 전각은 마련되지 않아 창덕궁의 후원 근처에 있던 수정당을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병은 여전하였고 옛 총부로 옮겨 모시기도 하였으나, 옛 총부는 대비가 오래 살 만한 공간이 아니었으며 공간도 협소하였다. 결국 1655년(효종 6)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서편에 있던 흠경각(欽敬閣) 터에 만수전(萬壽殿)을 새로 지었다. 효종은 장렬왕후를 위해 여러 전각을 수리하고 건강을 돌보았는데, 아마도 대조전 가까이에 대비를 모셔 두고 간병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1654년에 수리하여 대비가 머물기 적합한 전각의 규모를 갖춘 이후 수정전은 대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정조 연간에는 정순왕후가 이곳을 사용하였다. 1795년(정조 19) 1월 16일에는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환갑을 맞아 생일잔치를 벌이고 정순왕후와 혜경궁에게 존호를 올리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형태

정면 6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 집이다. 전면 1칸은 돌기둥을 초석으로 사용한 누각으로 이루어졌다. 정면에 월대를 갖추고 있다. 전각 사면에는 행각이 두르고 있으며 뒷마당에서 창덕궁 후원으로 통하는 읍청문(浥淸門)이 있다. 수정전으로 들어서는 문은 영훈문(迎薰門)이다. 영훈문을 통해 앞마당으로 들어서면 널빤지로 된 담장인 판장(板牆)이 마당을 가로질러 안쪽 전각을 가리고 있다. 판장에는 이각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처럼 수정전은 시선과 동선을 차단하기 위해 여러 차례 담장과 문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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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건 및 일화

정조는 49세 되는 1800년(정조 24) 6월 28일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는데, 죽기 전 희미한 목소리로 ‘수정전’이라는 말만 남긴다. 이때 수정전은 왕대비였던 정순왕후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志)』
  •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동궐도 읽기』, 창덕궁관리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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