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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6:42 기준 최신판



조선후기 인조 말~효종 초 김자점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인 내 분파의 하나.

개설

낙당(洛黨)은 인조 말 서인 세력 내에서 발생한 분파 가운데 하나이다. 당주(黨主)인 김자점(金自點)의 개인적인 정치력에 의존하였기에 효종 초 김자점이 제거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낙당은 인조 말년에 집권하던 서인 내의 한 분파로 형성된 세력이다. 이건창(李建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에 따르면, 인조 말년 서인은 원당(原黨)·낙당·산당(山黨)·한당(漢黨) 등으로 분화되었다. 이런 분파는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사망한 후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가 되고,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강빈(姜嬪)이 역모에 몰려 죽음을 당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낙당은 이 같은 상황에서 대체로 인조의 처분이 정당하다고 인식하는 집단이며, 대외적으로는 조정 내 대표적인 친청(親淸) 세력이기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낙당의 당주(黨主)는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김자점으로, 낙당이라는 명칭은 그의 봉호에서 유래하였다. 낙당에는 상당수의 공신 세력이 가담한 것으로 보이며, 효종 초에는 김자점 이외에 이시만(李時萬)·이이존(李以存)·이지항(李之恒)·이해창(李海昌)·엄정구(嚴鼎耉)·황감(黃㦿) 등이 함께 활동하였다. 신면(申冕)이 낙당의 일원인 듯한 기록이 있고(『효종실록』 3년 3월 23일), 송준길이 그를 낙당으로 공격하였지만(『효종실록』 즉위년 9월 13일), 신면의 참여 여부는 단정할 수 없다.

변천

낙당은 인조 말년 이후 원당과 함께 권력을 독차지하였다. 효종 즉위 초 낙당은 원당과 함께 김집(金集)을 비롯해 송시열 등 이른바 산당 세력들의 등용을 요청하였다. 이는 산당 세력들을 자신들의 당으로 끌어들여 산당들이 표방한 정치 명분을 자신들의 집권 명분으로 삼아 정국 주도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당은 조정에 진출한 뒤 정국의 일신을 위해서 낙당 세력의 퇴출을 추진하였다. 이즈음 효종 역시 북벌을 강조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대표적인 친청 세력인 김자점의 처벌은 불가피하였다.

이에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통해 효종이 예전 신하들을 물리치고 산림(山林) 세력들만 쓰고 있는데 그 이유가 청나라에 반기를 들기 위한 것이라고 청나라에 보고하였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경석(李景奭)과 예조 판서조경(趙絅)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의주의 백마산성에서 볼모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김자점은 결국 유배되고 얼마 뒤 역모를 꾸민 사실이 발각되어 아들인 김식(金鉽)과 함께 처벌되면서, 낙당은 유명무실해졌다.

참고문헌

  • 『당의통략(黨議通略)』
  • 이근호, 「효종대 집권 서인의 부세 제도 변통론: 정국의 추이와 관련하여」, 『북악사론』3, 1993.
  • 정만조, 「17세기 중반 한당(漢黨)의 정치 활동과 국정 운영론」, 『한국문화』23,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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